[영화읽기] 성스러움의 그물에서 자행되는 거대한 연쇄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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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성스러움의 그물에서 자행되는 거대한 연쇄살인
  • 승인 2023.03.1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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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현 기자

박숙현 기자

sh8789@mjmedi.com


영화읽기┃성스러운 거미

이슬람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차지하는 나라, 이란. 그곳에서도 이슬람인이 순례를 오는 성지 도시 ‘마슈하드’에서 매춘부만을 노리는 연쇄살인이 일어난다. 일명 ‘거미’라고 불리는 그는 1년 동안 16명의 무고한 여성을 살해하고, 이란의 여성 기자인 라히미가 범인의 뒤를 쫒는다.

범죄물 마니아라면 흔히 봤을 서두이지만 이 영화는 이란이 배경이라는 점에서 그동안의 범죄영화와 궤도를 달리한다. 우리나라였으면 CCTV나 블랙박스를 추적해 일주일 안에 범인을 찾았겠다 싶은 인프라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범인이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갈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들이 ‘매춘부’라는 점이다. 정확히는 신께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성지에서 감히 ‘짧은 옷을 입고, 껌을 짝짝 씹고, 침을 뱉으며 불경한 행위를 하는’ 여자들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당해도 싸다’는 인식이 수사망의 가장 큰 구멍이다.

감독: 알리 아바시출연: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 메흐디 바제스타니 등
감독: 알리 아바시
출연: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 메흐디 바제스타니 등

영화에서 불경한 여자, 피해자답지 못한 피해자를 바라보는 곱지 못한 인식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이미 매춘부들 사이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를 데려가는 남자가 연쇄살인마 ‘거미’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경찰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불경한 매춘부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범인을 목격한 자가 없는지 제대로 수사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화 초반부터 대놓고 등장하는 범인은 자신의 하잘것없는 일상에서 오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불경한 여자들을 신의 이름으로 처단’함으로써 정의의 사도이자 영웅으로 거듭나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 불경한 여자들을 피해자로 여기고 범인을 찾으려 하는 것은 여기자 라히미와 그의 조력자인 샤리프 뿐이었다. 라히미가 이 여자들을 피해자로 바라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 역시 일종의 불경한 여성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라히미는 히잡으로 머리를 대충 가렸고, 홀로 호텔방에 묵는 미혼 여성이며, 전 직장에서 남자상사와의 추문을 겪었기 때문이다. 라히미는 미리 예약한 객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전산오류로 거부당해야 했지만, 기자증을 내밀자 1분 만에 전산오류를 해결하고 객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는 기자증이 없었다면 그녀는 호텔조차 홀로 머무를 수 없는 반인분의 인격이라는 뜻이며, 이란에서 여성이란 종이 한 장으로 불경한 매춘부와 똑똑한 기자를 오갈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라히미는 범인을 추적하며 이 둘 사이를 오가는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라히미의 위태로운 추격이 성공해 범인이 붙잡히는 순간,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경찰의 수사망에 뚫려있던 ‘불경한 여자’라는 구멍이 범인을 잡은 뒤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특히 마슈하드를 떠나는 버스에서 라히미가 인터뷰 영상을 다시 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전까지 나왔던 그 어떤 살인행위보다 잔인하고 두려운 공포 그 자체다. 범인은 잡혔지만, 그의 연쇄살인은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이란과 종교의 압박 속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현실을 날카롭게 직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란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극히 이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영화는 덴마크, 독일, 스웨덴, 프랑스 등의 투자를 받아 진행된 ‘非이란영화’다.

언젠가 ‘이란영화’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불경함이라는 얄팍한 기준으로 피해자다움을 평가하는 사회에서 성녀와 악녀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위태로운 현실을 깨닫는 것이다. 제아무리 불경한 여자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애지중지 기른 딸이며, 그들을 잃고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가족이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박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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