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영의 제주한 이야기](9) 한의사엄마와 한의사딸의 기나긴 방학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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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영의 제주한 이야기](9) 한의사엄마와 한의사딸의 기나긴 방학 마무리
  • 승인 2023.03.1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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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영

남지영

mjmedi@mjmedi.com


기나긴 겨울 방학이 끝났다. 학교에서는 석면해체공사를 위해 여름방학을 짧게 잡고 겨울방학을 길게 배정했다. 12월 말부터 3월 1일까지 장장 2개월 이상의 방학.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내 심신이 힘든 것은 별개이다. 사랑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그나마 덜 힘들지만, 안 힘들 수는 없다.

필자의 딸은 이제 초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급했다. 관심과 집중과 질문의 수준이 높아지지만 부모의 손길이 아직은 굉장히 많이 필요할 시기다. 이 나이 때 사회생활(학교)이 충분히 가능하므로 의무교육이 시작되지만, 집에서는 아기+어린이+어른의 콜라보레이션이기 마련이다. 40대 중반인 나 역시 인간이기에 공감+노력+한계의 집합체이다. 장기간의 방학이 진행되면서 나와 딸에게 주어진 하루종일은 행복+연결+밀당+다툼의 비빔밥이 되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꽁냥꽁냥하고 세수하고 머리감고 하다보면 어느덧 아침식사시간이다. 필자는 심각한 저녁형 인간이라 10대때부터 아침밥보다는 늦잠을 선택하곤 했지만, 내 아이는 아침을 꼭 먹이고 싶다는 철학(?)으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식사를 먹도록 살피고 있다.

다행히 아이는 아침밥을 정말 잘 먹는다.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고, 식사하는 동안 대화(라고 쓰고 수다라 읽는다)를 하고, 다 먹으면 뒷정리를 한다. 별 거 안 한 것 같은데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수다떠는 아이를 제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색도 하며 스피드를 주어야 간신히 1시간 가량으로 끝난다.

그러고 나면 벌써 오전 9시가 다 되어 있다. 저녁형 인간으로서는 아침 6-7시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인 관계로 너무 피곤해서 잠시 쉬고 싶은 시점이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어린이는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함께 하고 싶은 것도 참으로 많다. 30분쯤 놀아주다보면 벌써 배가 고프다고 한다. 그 시간 동안 아이에게 온전히 집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는 만족이 힘들다. 중간 중간 한의원 상황 체크 하면서 메신저에 답변도 하기 때문이다.

한의원에 대표원장이 자리에 없어도 공백이 없게끔 하려면 늘 상황파악은 하고 있어야 한다. 중대한 의사결정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늘 긴장상태다.

아무튼 아이가 배가 고프니 간식으로 과일을 깎거나 떡을 데워, 먹는 것을 함께 하고 잠시 의자에 앉아 전자차트와 메신저를 볼라치면 어느덧 12시 즈음이다. 먹고 나서 뒤돌면 배고픈 초등학교 저학년의 배꼽시계가 째깍거리는 시간. 그리고 방과 후 활동이 대부분 2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얼른 점심을 먹고 준비해야 한다.

아이의 준비시간은 짧지 않다. 밥 먹다가도 화장실이 마렵고, 화장실 갔다가도 엄마의 마무리가 필요할 때가 있고, 양치하면서 어제 배운 장영실과 세종대왕 이야기가 생각나서 궁금하며, 허준 만화책이 떠올라서 엄마에게 진짜인지 물어봐야 하고, 옷 입으면서 내 머리 사이즈는 평균에 비해 어느 정도인지 꼬꼬마때는 얼마만 했는지가 알고 싶다. 아이가 생각하고 말하는 이런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답변을 궁리하고 대화하다보면….5분이면 끝날 일이 40분이 걸린다. 이제 슬슬 한계다.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하며 끄덕이고 아이 마음을 읽으면서 대화하는 시간. 그렇게 함께 하면 충분할 줄 알았건만, 그럴수록 아이는 수다가 많아진다. 나는 흐름이 끊겨 할 일을 하지 못한다. 공감하며 대화하는 것이 평화로운 일상이라는 착각, 매일 매일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마법에 걸렸기 때문이고 고슴도치 엄마라는 콩깍지가 씌어서일 것이다.

엄마의 인내가 한계점에 임박할 즈음 다행히 아이의 외부활동이 시작된다. 보통 2시부터 5-6시 경까지 태권도, 영어, 수영 등을 배우고 온다. 그 3-4시간 동안 한의원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 하루 동안 하는 일을 그 시간동안 모아서 압축적으로 해야 하고, 남은 집안일도 해야 한다.

허덕이며 일처리를 마무리할 때쯤 아이가 귀가한다. 엄마랑 껴안을 기쁨에 가득헤서, 맛있는 간식과 밥을 먹을 기대에 가득해서, 오늘 있던 일에 대한 수다를 한껏 떨 기다림에 가득해서 돌아온 아이.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다. “이렇게 예쁜 아이가 어디서 나왔지? 엄마 뱃속에 어떻게 뿅하고 나타났지??”하며 반갑게 맞아 맛난 밥을 해 먹인다. 저녁 준비하고 먹고 치우고, 아이도 조금 쉬면 벌써 8시다. 식사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하는 분들은 직접 한 번 해 보시라. 그런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 뒤 숙제 10-20분 정도 하고 샤워하면 9시. 아아~ 자야 할 시간이구나. 앗, 잠시만 딸래미야 한약 깜빡했구나. 한약 먹고 양치하자 하면 대번에 “엄마~ 잘 때 동화책 몇 권 읽어줄 거야?” 라는 질문이 온다. 정신적 육체적 피로누적을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동화책을 읽다보면 아이가 잠이 든다. 때로는 나도 함께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에 할 일이 누락된 것을 깨닫고 울그락불그락하기 일쑤다. 이럴 때 소시호탕이나 육울탕을 먹어서 소간해울을 해야 할까, 공진단이나 경옥고를 먹고 체력회복하는 게 우선일까 고민하는 사이 아이가 벌써 깬다.

아이야, 아침밥 먹고 우리 같이 한약 먹자. 엄마는 체력보약, 너는 성장보약.

약 먹고 너는 등교하고 엄마는 출근하자.

한약없이 어떻게 살 뻔 했니. 학교없이 어떻게 살 뻔 했니.

개학이여, 감사합니다.

 

남지영 / 경희미르애한의원 대표원장, 대한여한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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