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문학하기](10) 더 이상의 채영신은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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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문학하기](10) 더 이상의 채영신은 곤란합니다
  • 승인 2023.03.24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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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지리산 바래봉의 봄(사진: 전석호, 출처: 국립공원관리공단)

까마득한 중학생 때였나 심훈의 <상록수>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채영신은 농촌을 계몽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청춘을 헌신하며 뜻 맞는 남자와 연애도 했으나 결국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고 말았는데, 당시 중학생 독자로서는 주인공이 (심지어 결혼도 못 해보고) 죽는 결론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작가는 농촌 계몽을 향한 그녀의 꿈이 삶과 죽음보다 숭고하다는 우아한 결론을 냄으로써 소설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려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농촌에 와서 살다 보니 희한하게도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채영신을 자처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세상이 좀 더 좋아지길 바라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쓰는 그 열정에 감탄하곤 하지만, 그분들과 나누는 어떤 대화들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고 불편하다. 특히나 지난 10년여 간 지식을 둘러싼 권력 관계에 예민해지도록 훈련받은 인류학 전공자로서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 농촌주민들에 대한 ‘계몽’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는 식이다. 딴에는 직설적인 비판이랍시고 “그런 건 계몽주의자들이나 하는 말이죠”라고 되받아쳐 봐도 정작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계몽’이 뭐가 나쁘냐는 듯한 의아한 눈빛들이다. 그런 말씀 하시는 분들은 거의 대졸 이상의 고학력 귀촌자들인데, 그러다 보니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농촌주민들은 '뭘 잘 모르고' '계몽'시켜야 할, 그리고 '돈에 환장해서' 개발에 찬성하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그걸 완곡하고 고상하고 교양 있는 어법으로 포장할 뿐.

최근 몇 년 동안 지역에서 첨예한 관심사였던 지리산 케이블카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인근 3개의 지자체에서 수십 년째 케이블카 노래를 부르고 있고, 남원에서는 지리산에 산악열차를 놓기 직전인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설악산 케이블카가 허가되었으니 지리산 산자락에 사는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 떨어진 느낌이다. 물론 개인적으로야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라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지역 내에서는 이런 식이든 무슨 식이든 개발에 찬성하는 여론이 좀 더 우세한 편이다. 활동가나 외부자의 시선에서 주민들의 이런 여론은 종종, ‘돈에 환장해서 개발에 찬성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다.

어른들 얘기 들어보면, 대를 이어서 살았던 땅에서 내 자식도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개발에 찬성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젊은 주민들도 비슷한 생각들이다. 시골 촌구석에서 벌어먹고 살 게 없으니 다 떠나버리는데 이곳에서의 삶은 진짜 지속가능한가 하는, 말 그대로 실존적인 고민들을 하는 셈이다. 농촌에서의 삶이 더 나아질 일은 없어 보이고 나빠질 가능성은 거의 100%에 수렴하는 상황이다 보니, 케이블카든 뭐든 이런 고민 속에서 그럴듯한 유일한 대안처럼 자리잡게 된다. 지역주민들이 갖는 실존적 불안감을 해소하면서 산도 망가지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것을 찾아보기도 전에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너무나 많다.

우선은, 지자체장 및 지자체장을 옹위하는 지역 토건세력들이 주민들의 불안감을 이용해 더 많은 토건 사업에 착수하려고만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도 안 다니는 생뚱맞은 곳에 다리를 놓거나, 지리산을 깎아서 관광객 유치를 위한 숙박시설을 짓겠다는 식이다. 정작 이미 운영 중인 시설의 숙박 이용률은 연평균 50% 선에 불과하더라도, 혹 반대여론이 있더라도, 과감히 강행한다. 지역 발전이라는 말은 무엇이든 해치울 수 있는 전가의 보도와 같고, 지리산이든 뭐든 일단 굴삭기로 땅을 파헤치고 나면 그다음에는 늬들이 어쩔 거냐는 뚝심도 느껴진다.

지역 내 활동가들이라도 주민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해보고 그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보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농촌 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주민들의 본질적 질문에 공감하고 함께 답을 찾기보다 '너의 생각을 교정하고 계몽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껄끄러운 귀촌인들이 선주민들의 ‘무지’를 지적하며 ‘계몽’만을 외치다 보니 서로 감정만 상하게 되고 갈등은 골이 깊어지고 만다. 선주민들은 귀촌인들을 재수없게 잘난 척 한다 여기고, 귀촌인들은 선주민들이 텃세를 부린다고 속상해하는 악순환은 바로 이 맥락 위에서 돌고 돈다. 그 두 입장을 잘 조율하고 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지자체장의 정치적 역량이겠지만, 애초에 주민들의 불안감을 이용해 더 많은 토건 사업으로 실적을 전시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지자체장들이 그런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다.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신유정 / 한의사, 인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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