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8)
상태바
[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8)
  • 승인 2005.09.23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 石鼓의 출토지 보계시 ■

우리는 보계현(근자에 陳倉區로 바뀜)을 지나 보계시에 진입하여 보계시 가이드를 태우고 청동기 박물관을 향해 출발했다. 보계시의 가이드는 보계시에서는 당나라 초기에 지금의 보계시 교남구(郊南區) 석고산 석고사(石鼓山 石鼓寺)에서 10개의 북 모양을 한 돌인 석고(石鼓)가 출토되었고 각 돌마다 사언시(四言詩)가 한 수(首)씩, 10수(首)의 시가 씌어져 있었는데 이를 석고문(石鼓文)이라 하며 청나라 말기의 강유위가 중화제일 유물이라고 높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석고의 내용은 진왕(秦王)이 고기잡고 사냥한 일을 기술하고 있는데 문자학(大篆과 小篆의 사이에 위치함), 역사학, 서법(書法) 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지금 이 석고는 북경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버스는 어느덧 위하(渭河)의 남쪽 인민공원(人民公園) 옆에 있는 청동기 박물관에 도착했다.

■ 청동기의 고향(靑銅器之鄕) 보계시 ■

보계시에는 청동기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청동기라고 이름한 전국에서 유일한 박물관으로 1998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박물관의 모습도 평평한 5개의 청동정(靑銅鼎)의 모습으로 건축되어 있다. 가운데 있는 정(鼎)은 보계시의 옛 어국(어國)에서 출토된 짐승 얼굴 무늬가 있는 네모난 정(獸面紋方鼎)이고 사방에 있는 것은 발꿈치를 베이는 형벌을 받은 노예가 문을 지키는 정(월刑奴隸守門鼎)으로 원형이 설계된 독특한 특색을 갖추고 있다. 編註 [월=벨 월, 발뒤꿈치를 베는 형벌]
청동기의 출현은 인류사에 있어서 시대의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으로써 인류가 문명시대로 진입했다는 중요한 표지 중의 하나가 된다. 고고학의 자료에 의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는 B.C. 2000년쯤에 시작되었고 서주(西周)의 청동기는 특히 세계적으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찬란하게 눈부신 보배들이다.

(1) 晩淸의 사대국보 청동기가 출토된 보계시

주원유지(周原遺地 ; 문왕의 할아버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적인(狄人)을 피해 와서 자리 잡은 곳이며 주의 건국의 기틀을 정한 곳)와 옹성유지(雍城遺地 ; 봉상현으로 초기 진나라의 수도)를 핵심으로 하는 보계지구에서는 한나라 선제(宣帝)때 미양(美陽 ; 지금의 섬서성 扶風縣)에서 시신정(尸臣鼎)이 나온 이래 역대에 걸쳐 청동기 유물이 끊임없이 출토되었다. 미국으로 유출된 봉문유(鳳紋유), 덴마크와 일본으로 유출된 고전굉(告田굉)과 소극정(小克鼎), 만청(晩淸)의 사대국보로 명예를 누렸던 모공정(毛公鼎), 대우정(大盂鼎), 괵계자백반(괵季子白盤), 산씨반(散氏盤)이 모두 여기에서 출토되었다. 뒤이어 유명한 대극정(大克鼎), 하준(何尊), 사장반(史墻盤), 진공박(秦公박) 등도 모두 이곳에서 출토되어 예로부터 보계는 “청동기의 고향(靑銅器之鄕)”으로 중국과 해외에 알려져 있다. 編註 [유=술통 유] [굉=뿔잔 굉] [鼎=솥 정] [괵=범 발톱자국 괵] [尊=술통 준] [박=종 박]

보계청동기의 특징은 첫째 수량이 많고 종류가 완전하고 규모가 큰 것이 많으며, 둘째는 과학적인 가치가 높고, 셋째는 역사적인 자료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우리가 박물관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자 “주진문명지광(周秦文明之光)”이라고 금빛 글자아래 모공정, 대우정, 괵계자백반, 산씨반의 네 개의 청동기를 진열해 놓았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복제품이라고 한다. 모공정은 1843년 보계시 기산현(岐山縣)에서 발굴 되었는데 현재는 대만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것은 497자의 글씨가 쓰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주나라 11대 선왕(宣王)의 경계의 말과 훈사(訓詞)가 기술되어 있다는 데 있다.

괵계자백반은 청나라 도광(道光 1821 ~1850)제 때에 보계현에서 출토되었고 현재는 북경의 중국역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111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서괵(西괵) 제후의 막내아들(季子) 백(白)이 주선왕의 왕명을 받고 북방의 민족과 전쟁을 하여 큰 승리를 거두자 주선왕이 잔치를 벌이고 상을 내려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데 이때가 주선왕 12년(B.C. 816년)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귀중한 청동기이다. 특히 이 자료는 서주 후기 주나라 왕실과 북방민족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중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이곳 보계시에서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는 것은 이곳이 서주 왕조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주나라의 시조 기(棄) 즉 후직(后직)은 희(姬)씨로 황제의 후손이라 한다. 그는 순(舜)임금 때 농사(農師)가 되어 태(邰 ; 지금의 섬서성 扶風縣, 武功縣일대)에 봉함을 받았고 3세(世)를 지나 4세(世)인 공류(公劉)가 빈(빈 ; 지금의 함양시 長武縣 彬縣 일대)으로 이주를 하였다. 다시 9세를 지나 13세(世)인 고공단보(古公亶父) 때 기산(岐山)의 남쪽인 주원(周原 ; 지금의 보계시 扶風 岐山일대)으로 이주를 하여 성을 쌓고 궁실을 짓고 주(周) 나라를 건국하여 주왕조 800년의 기업(基業)을 개창하였던 것이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