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770> - 『政和本草』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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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770> - 『政和本草』③
  • 승인 2017.03.24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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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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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탄할 만한 朝鮮古板, 대표 본초서

전호에 이 책의 조선 판본이 대부분 일본에 건너가 수장되어 있다고 했는데, 내친 김에 三木榮이 펴낸 『朝鮮醫籍考』를 살펴보니, 진즉부터 이 조선판이 일본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일 저자의 『朝鮮醫事年表』에는 1577년 2월경 명간본(成化4)을 覆板하여 활자로 『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서례 포함, 전31권25책)를 간행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中尾萬三이 『日本藥報』에 소개한 자료에 의거하여 임란 이전에 간행한 조선활자본은 30권25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간원 대사간으로 있던 崔顒(생몰년 미상)이라는 사람에게 하사된 內賜記가 붙어 있다고 하였다. 최옹은 1555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여러 요직을 거쳐 당시에는 대사간에 지위에 있었다.

이 책은 전호에 말한 岩漱文庫(조선 전기 乙亥活字 인본)에 수장된 完本으로 보이는데, 일본의 유명한 의학장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養安院의 장서인이 찍혀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존된 내력이 조사되어 있으니, 500년 가까운 세월 이역에서 만고풍상을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전해졌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또 이 글 안에서 『의방유취』와 『정화본초』를 비롯하여『牛疫方』, 『大觀本草』, 『簡易辟瘟方』등의 귀중한 의학서가 일본 안에 보존된 것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중국에서도 이미 잃어버린 唐宋시대의 귀중한 의학서적들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오로지 조선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라고 평론하고 있다.

본서는 원래 처음에는 唐愼微 개인의 저술로 편찬하였으나 곧이어 국가적으로 중요성을 인식하여 지방관청에서『大觀本草』로 간행하게 되었다. 연이어 『政和本草』,『紹興本草』로 수정 개편하였으며, 이후에도 『重修政和本草』,『新編證類圖注本草』로 수정증보하면서 판을 거듭하였다.『本草綱目』도 역시 이 책을 저본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李時珍은 “諸家의 본초와 千古의 단방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존한 공로가 있다”고 찬양하였다.

이 책은 한마디로 송대 본초학의 업적을 총괄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본초강목』이 나오기 전까지 약 500년 간 조선과 일본에까지 많은 영향을 끼친 본초학의 규범서로 인식되었다. 더욱이 조선에서는 『본초강목』이 나온 뒤에도 여전히 본초약물에 관한 표준공정서의 위치를 내놓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미 오래 동안 사용해온 이 책이 나중에 도입된 『본초강목』에 비해서 개별 약물의 고증과 원전에 충실하다는 점이 손꼽힌다.

『본초강목』은 『증류본초』의 후대 판본이라 할 수 있는 『정화본초』와 『대관본초』를 모체로 374종의 약재를 증대하고 송대 본초서 이후의 성과를 담아내는데 성공하였지만, 이전 본초서의 인용문을 잘라내 고치는 과정에서 잘못된 곳이나 원래 모습을 훼손시킨 경우가 많아 후대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동의보감』· 역대의방에 ‘備用本草經史證類’라는 명칭으로 올라 있으며, 본문 안에서 ‘本草’라고 出典이 표기된 것은 대개 이 책을 말한다고 한다. 『동의보감』 안에는 무려 3370조문 달하는 ‘본초’가 다량 인용됨으로써 인용빈도에 있어서 首位를 점하고 있다. 또 『新纂辟瘟方』 등에는 ‘證類本草’로 인용되어 있다. 조선족 의사문헌학자인 崔秀漢은 『朝鮮醫籍通考』에서 조선의 『향약집성방』도 약물의 배열방법이나 서술내용에 있어서 주로 이 책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였으니, 한의본초학 발전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본초서라 할 수 있겠다.

 

안 상 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식치융합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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