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강솔의 도서비평] 회의하고 주저하는 인간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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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강솔의 도서비평] 회의하고 주저하는 인간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
  • 승인 2023.06.23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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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솔

강솔

mjmedi@mjmedi.com


도서비평┃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십 대 무렵의 나는 늘 늪을 걷는 것 같았다. 삶의 바닥이 언제든 푹 꺼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경계와 모서리가 모호해서 사람들을 거절하지 못했고 어떤 신념을 완전히 추종하지 못했다. 딜레마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래서 회색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처 없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늘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았다. 아이를 낳고서야, 바닥이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테두리를 짓기 편해졌고, 방향을 찾기도 쉬워졌다. 물론 그 전까지와 다른 유형의 혼돈이 시작되기도 했지만.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곰출판 펴냄

이 책은 선배가 <멍게에게 미안하다>라고 코멘트를 남겨서 왜 멍게에게 미안한 거지?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던 책이었다. 프롤로그부터 매우 문학적이다. 그녀의 문장들은 마음을 훅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작가가 묘사한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보면서 오랜만에 정처 없던 내 이십 대의 감정이 떠올랐다. 저자가 십 대와 이십 대를 지나며 느꼈던 불확실성과 혼돈에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집중해서 작가가 원하는 속도대로 충실하게 페이지를 넘겼다. 책을 다 읽은 뒤에 수다를 떨고 싶었는데 동시에 또 새로 읽기 시작할 누군가에게 내용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가을에 생일인 친구에게 이 책을 네 생일에 보내줄 테니 그때까지 절대 읽지 말라고 하였다. 이 책에 관한 서평도 읽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뒷 페이지를 먼저 넘기지 말고 작가의 호흡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ㅋㅋ.

작가는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 인생을 쫓아간다. 조던은 어류의 새로운 종을 발견하고 분류하여 명명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했던 과학자였다.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자신이 명명한 표본들이 다 무너져 내려 표본들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던 순간에, 불굴의 의지로, 물고기 자체에 바늘로 표본을 새기는 시도를 하였는데 작가는 그 순간에 주목한다. 왜 그는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어렸을 때 분명 혼돈과 모호함 속에 있던 – 작가 자신처럼 - 수줍었던 소년은 어떻게 그런 열정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람이 되었을까. 혼돈스러운 자신의 삶도 그렇게 열정적이고 단단해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그녀는 조던의 삶을 쫓아간다. 나는 작가에게 감정 이입하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조던의 삶을 쫓아가는 여정은 놀라왔다. <긍정적 착각>이라고 중립적으로 표현되는 삶의 태도,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긍정적 착각>이 잘 되는 사람들과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긍정적 착각>에서 자기기만, 부적절한 자기 확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관해, 한참 머물러 생각하게 되었다. 의심스러운 사망 사건, 우생학의 추종...적절한 <긍정적 착각>과 <부적절한 자기 확신>의 경계는 어디인가?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해서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어류라는 분류는 없다는 것. 우리가 사다리를 세우고 범주를 나누는 이 분류들이 온전한 진실은 아니라는 것. 물속에서 ‘비늘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어류로 분류된 생명들을 어류로 분류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기준, 물고기라는 기준을, 버려야 할 때,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버릴 수 있는가? 이 세상을 명확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그 사다리의 맨 위에 인간을 놓고, 인간들의 성향과 도덕적 가치 등으로 옳고 그름과 우성과 열성으로 나누는 분류를 한때 진실로 믿었다. 그런 사다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사다리 너머에 삶의 신비가 있다.

혼돈 속에서 망설이며 회의하고 주저하고 자책했던 나의 삶을 떠올랐다. 그럴 때면 확신에 차고 옳고 그름이 명확해 보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마치 이 책의 조던같은) 진료실에서 만나는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워 고통스러운 환자들이 떠올랐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기는 헤맬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사춘기 아들이 떠올랐다. 마음이 좀 더 단단하면 좋을텐데, <자기 긍정>이 더 잘되는 사람이면 살기가 편할텐데... 나에게도, 환자에게도, 아들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러게. 분류가 명확하게 된 사다리를 따라 올라가기가 어렵거나, 혼돈하고 주저하며 회의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때때로 물고기라는 통념적 기준을 놓아야 할 때, 명확하고 명료한 기준들을 놓아야 할 때, 그때 삶에선 또 다른 선물을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믿음. 혼돈과 혼란을 벗어나 자기 확신으로 그릿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누군가가 우생학적인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 세계에서, 나의 소심하고 회의하는 삶, 물고기를 놓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 서로에게 그물망이 되어주는 삶이 그럭저럭 괜찮다는 위로. 멋진 책이었다.

 

강솔 / 소나무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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