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16) 산책길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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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하기](16) 산책길이 사라졌다
  • 승인 2023.10.20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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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해질 무렵 강둑에서. 복구 사업은 내게서 이 평화를 빼앗아갔다.

5년 남짓 짧은 시골살이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뭐니 뭐니해도 2020년 물난리다. 그 전후로 우리 가족의 삶도 크게 바뀌었는데, 그중 하나가 강둑으로 가는 산책길이 사라진 일이다. 산책길 따위가 뭐라고 삶을 운운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매사 심드렁한 남편이, (겨우) 그 길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집을 팔고 구례를 떠나고 싶다고 할 정도이니 최소한 우리에게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예전 같았으면, 집이 위치한 마을 언덕길의 야트막한 경사길을 내려가다 왼쪽에는 감나무밭, 오른쪽에는 널따란 밭고랑 사잇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섬진강과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강둑길이 나왔었다. 특히 요즘 같은 철에는 길가에 대봉감들이 떨어져 있어, 하라는 산책은 안 하고 고랑에 코를 박은 채 감만 주워 먹는 우리집 개랑 실랑이를 했었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해 저문 늦은 저녁에는 그 길을 따라 강변길 곳곳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녀 장관이었다. 가로등 없는 시골길이라 온 가족이 반딧불이 보러 나가 함께 걷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게 된 지 벌써 삼 년째다.

공사는 우리 마을 앞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섬진강을 따라 구례 곳곳이 홍수 예방, 피해 복구라는 명목으로 해가 넘고 또 넘어서도 온통 굴삭기와 덤프트럭 천지다. 오죽하면 맘카페에서조차 너무 공사만 해대니 다시 이사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평들이 터져나오는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도 구례군은 올해 또 1조 5천 억 짜리 사업이라며 ‘양수발전소’를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참이다. 만약 유치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덤프트럭과 포크레인들을 또 다른 수년 동안 인내해야 할 것인지 아득하다. 게다가 그 양수발전소가 지어질 곳이 바로 내가 사는 문척면이다. 1조 5천 억은 정말 큰 돈인데, 군수는 그 돈이 모두 구례 지역에 뿌려지는 것처럼 말한다.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도무지 알 방법은 없다. 장담컨대, 양수발전소를 짓는다 치고 완공되더라도 그 돈이 지역에 어떻게 골고루 잘 뿌려졌는지, 그래서 누군가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아졌는지는 아무도 모를 게 분명하다. 지금 수해복구 예산만 해도 4천 억 가까운 규모의 어마무시한 돈이라지만,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공사판 속에서 삶의 질이 추락하고 있다는 분명한 감각뿐이다. 차에 뿌옇게 내려앉은 공사 먼지들과 사라진 산책길, 걸어서 다닐 수 있던 땅의 반경이 급격하게 좁아져 버린 불편감 등. 그 돈은 누구에게 갔으며 누가 그 돈으로 행복해졌는지, 내 주변에서는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다. 토건 개발로 부자가 될 것이라는 신화만이 유령처럼 지역을 떠돌아다닌다.

‘신화’는 인류학에서 진부하리만큼 사용하는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로마에만 신화가 있는 게 아니라, 2023년 대한민국에도 신화가 존재하니 짚고 넘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 신화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과 문화의 무의식적 토대가 되고 행동유형을 결정하기도 하는 ‘집단적 상상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인류학자들이 해왔던 작업들도 ‘신화 깨부수기’로 귀결되는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면, 태어난 아이를 돌보지 않고 죽도록 방치하는 브라질 빈민가 엄마들의 사례를 통해, 모성애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는 신화를 박살낸 작업 같은 것 등이다(Nancy Scheper-Hughes). 흔히 말하는 ‘엄마의 손맛’ 같은 것도 나처럼 요리에 흥미 없는 엄마들을 압박하는 강력한 신화 중 하나다.

당장 지금 우리 가족이 구례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것도 그러한 신화의 무게인 셈이다. 더 많은 토건 사업, 더 많은 개발로 지역은 부자가 될 거라는 강력한 신화. 어떤 곳이든 일단 포크레인으로 판 후 콘크리트 구조물을 더 많이, 더 넓게, 더 높이 쌓아 지어두면, 그 사업비가 다 지역에 골고루 뿌려져서 지역이 발전한다는 신화 말이다. 1조 5천억이나, 4천 억 규모 사업이라는 말 속에서, 당장 주민들의 산책길 따위야 아무 의미없는 웅얼거림으로 무시될 뿐이다. 돈이 그만큼 풀린다는데 산책길 좀 없어지면 어떠냐고 누군가 눈을 부릅뜨며 내게 화를 낼 것만 같다. 만약 공사 좀 그만하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군수 대신 나서서 역성들 사람들이 줄을 설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나아졌냐 물으면 그들 역시 딱히 대답할 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이와 함께 춤추는 반딧불이를 쫓아 달리던 순간들, 해질 무렵 개와 함께 맞던 강바람, 산책길에 오가며 만나 인사를 주고받던 아랫마을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짧고 다정하던 대화들. 그 모든 게 사라졌지만, 대신 존재감을 과시하는 콘크리트 구조물만이 위풍당당하다. 공사가 다 끝난 후에 누군가 그 돈은 어디 갔냐고 물어도 그때는 의미 없는 말이다. 그 돈은 우리의 일상과는 상관없지만 아무튼 지역에 뿌려진 게 분명하다고 할 것이고, 변화를 바란다면 더 큰 규모의 사업을 따와야 한다고 또다시 우겨댈 거다. 업적을 과시하며 재선·삼선을 노리는 지방 정치인들에게, 그리고 토건 자본에게, 이 콘크리트 신화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 이 신화만 적절히 써먹으면, ‘1조 5천억’을 외치며 주민들을 눈멀고 귀먹게 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 내 산책길!

 

신유정 / 인류학 박사,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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