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17) 광해(光害)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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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하기](17) 광해(光害)를 아시나요
  • 승인 2023.12.01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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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pixabay.com에서 다운 받은 은하수 이미지. 가장 아름답고 선명한 은하수는 1급지(광해가 전혀 없는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우리 마을을 오가는 길에는 원래 가로등이 없었다. 2018년에 시골에 와서 가장 의아했던 게 마을 들어오는 길에 가로등 하나도 없이 컴컴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람 다니고 차 다니는 길이 대체 어떻게 이토록 어두울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귀촌한 다른 집들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지, 환한 가로등을 달아달라고 여러 차례 군에 민원을 넣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도 있다. 도시 살던 사람들 생각에 어두운 밤길은 범죄와 직결되고 민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 덕에 지금은 점멸하는 - 그래봤자 대단히 환하지는 않은 - 가로등이 서너 개 정도 세워졌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삼 년을 살고 나서 드디어 깨달은 것은, 도시의 불빛이 이곳에서는 ‘공해’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감, 대추, 감자, 배추 등 작물이 심긴 노지에 밤낮없이 환한 빛을 쪼이는 것은 식물들을 못살게 구는 나쁜 짓이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낮과 밤이라는 우주적 시간표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대끼다보면 작물의 수확량도 확 줄고, 결국엔 농민들만 못할 노릇이 되고 만다. 생각해보면, 연말연시에 관공서마다 마당에 있는 소나무에 작은 전구들을 칭칭 감아두곤 하는데, 나무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런 행사를 늘 비판했던 기억이 난다. 나무들이 밤에도 쉬지 못하고 인간의 기쁨을 위해 생명을 담보 잡히는 셈이니 찝찝한 뒷맛이 남는 행사이긴 하다. 구례군에서 가로등 민원을 도시의 방식대로 신속하게 처리해주기 어려웠던 이면에는, 농작물의 복지가 곧 농민의 복지로 직결되는 농촌의 실존적 고민이 존재하는 셈이다.

광해는 꼭 식물에만 악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최근 수년 새 급감한 반딧불이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친 것 역시 광해라고 한다. 먹이도 줄고 물도 오염되었지만, 곳곳에 24시간 반짝이는 불빛들이야말로 반딧불이 번식에 심각한 스트레스 요인이 된다고. 게다가 도시의 불빛은 별빛조차 가려버린다. 지리산 자락은 천체 관측에 최적의 장소 중 하나이지만, 당장 구례읍내와 우리집 근처만 비교해봐도 밤하늘의 풍광이 매우 다르다. 여기저기 환하고 아름답게 켜진 불빛들 속에서는 정작 몇만 광년의 시공간을 뚫고 지구까지 도달한, 순전하게 아름답고 신비한 그 별빛들을 좀처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주변에 방해하는 빛들이 없이, 눈이 온전히 어둠에 적응하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런 별들이 눈에 들게 된다. 그러고 나면 비싼 망원경이 아니어도 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부지런히 돌고 있는 목성과 위성들, 카시오페아 별자리들과 흐릿하게 보이는 안드로메다 은하를 볼 수 있다. 밤하늘을 올려 보다 보면, 오늘 하루 내가 겪은 갖가지 잡스럽고 꾸질꾸질하며 골머리가 아픈 일들조차 우주의 먼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된다. 이렇게 우주의 시공간 속에서 치유받는 건 오직 도시의 불빛이 없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정말 아름다운 것은 싸고 쉽게 반짝거리는 것들에게서 거리를 둘 때에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커멓게 어둠이 내려앉은 섬진강 강둑길에서라야 반딧불이들이 추는 춤을 볼 수 있고, 가로등 불빛이 꺼졌을 때에라야 한겨울 머리 위에 뜬 오리온자리와 오리온 대성운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환한 밤거리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는데, 그런 불빛이 오히려 내가 사랑하고 보고 싶은 것들을 못 보게 만든다는 깨달음은 나름 충격적인 것이다. [어두운 밤거리 = 범죄]가 아니라 [어두운 밤하늘 = 반딧불이와 별 무리]로 관점을 바꾸고 나면, 고요하고 적막한 밤, 사람도 없는 사방 툭 터진 땅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얼마나 충만한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머리 위를 온통 가로지르는, 그 흐릿하고 광활한 은하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존재감을 절감하며 압도당하고 만다. 우리가 우주의 먼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희한하게도 나를 격려하고 맘 편하게 해주며, 오히려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찌질하고 쪼잔하고 후진 인간이라도, 우주는 그렇지 않을 테니. 변함없이 자전하고 공전하고 움직이면서 시공간을 끊임없이 만들고 유지·보수하면서 나의 찌질함에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 모두가 괜찮을 것이다. 내가, 우리가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우주는 결코 망가지지 않고 엉망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결국 우리도 괜찮다.

 

신유정 / 인류학박사,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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