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4] 金性璂(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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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4] 金性璂(1879~?)
  • 승인 2007.03.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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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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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醫學硏究會 창설해 韓醫師들 대동단결에 힘써

일제시대 가운데 1920년대는 한의사들이 흔들리는 한의학의 정체성을 바로 잡고자 노력한 시기이다. 유일하게 한의학을 할 수 있는 관문이었던 醫生試驗조차도 서양의학적 내용으로 출제되어 醫生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서양의학을 학습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한의학 왜곡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시험구조 속에서는 한의학을 잘 하는 사람보다 서양의학만 잘하는 사람이 의생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됨에 따라 한의계에서는 서양의학 학습이라는 이상열풍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韓醫들은 이러한 시대에 자칫 잘못하여 한의학을 경시하게 되는 풍조에 사로잡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의 시정을 위해 한의학 학술잡지를 잘 활용하였다. 1916년부터 간행된 『東西醫學報』나 1923년부터 간행된 『東西醫學硏究會月報』같은 학술잡지들이 그러하다.
이들 학술잡지는 서양의학 위주로 출제되고 있는 醫生試驗에 대비하고자 하는 예비 의생들의 수험준비서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이미 醫生이 되어 韓醫業에 종사하고 있는 韓醫들에게도 서양의학적 지식을 공급하는 창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잡지의 지면을 통해 韓醫學術의 내용과 韓醫들을 계몽하여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보건관련 내용들도 다수 싣고 있다.

1914년 희망차게 출발한 全鮮醫會라는 한의학 학술단체는 이듬해인 1915년에 일제와 협력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협력을 선택하는 것보다 단체의 해체가 나을 것이라는 결론 속에서 자진해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韓醫師들은 公認醫學講習所를 열어 후진의 양성에 힘썼고 『東西醫學報』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여 학술적 연구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고양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의사들은 거의 사멸의 상태에 빠진 한의학을 되살려 민족정기를 드높여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2년에 東西醫學硏究會라는 학술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이 硏究會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한 명의 뛰어난 인물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金性璂(1879~?)이다.

金性璂는 한의사단체를 만들어 일제에 저항하기 시작한 1910년대부터 이름이 거명되고 있지만, 그가 중심인물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그는 東西醫學硏究會가 결성될 때 회장으로 취임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학회는 1923년에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대단위 조직으로 성장하게 된다. 本會에서는 講習會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順化病院에 한방진료소를 설치하기도 하였고, 附屬醫學講習院을 설치하여 한의학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는데, 金性璂는 이러한 활동에 항상 중심이었다.
金性璂는 1923년 『東西醫學硏究會月報』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다. 그는 本誌의 창간사에서 “반만년 醫界歷史의 삼천리 강역에서 福音을 크게 포효하였다”라고 감회를 적고 있다. 그는 東西醫學硏究會를 이끌어가면서 학술단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1924년에 나온 『東西醫學硏究會月報』 1월호에는 “本會의 前途는 悲觀이냐? 樂觀이냐?”라는 글이 나오는데, 이 글을 통해 그는 “時代는 日復日變遷하야간다. 그러면 時代變遷을 따라 思想도 變遷하여야 할 것이다. 他的思想은 日復日開展하는데 我的思想은 日復日沈淪한다 하면 진실로 消極的 自滅的이다. 環境의 現狀을 보라. 事業의 大小는 不拘하고 團體를 組織하지 안인 것이 없다. 그 團體의 鞏固發展에 基因하여 無形의 勢力도 增長되고 無形의 愛心도 聯絡되고 無形의 知識도 交換됨은 天然的 公理이다. 우리도 感情的動物인 以上에는 한번 討究할 가치가 있다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시기에 그는 慈生醫院이라는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환자의 진료에도 힘썼다. 진료를 하면서 特效方의 수집에 정열을 기울여 몇 개의 처방을 잡지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痘後餘熱未정의病’에 사용한 療熱解毒湯(連翹, 防風各二錢, 羌活, 柴胡, 南星, 半夏, 吉更, 前胡, 牛方子, 只角, 赤伏令, 荊芥穗, 川芎去油, 甘草各一錢)와 ‘暴怒傷肝의病’에 사용한 補腎平肝湯(熟地黃, 白芍藥, 山茱萸, 各三兩, 麥門冬一兩五錢柴胡, 山외子, 白芥子各三錢)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처방들은 당시 많이 발병하였던 天然痘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처방과 간장질환을 치료하는 처방을 韓醫들에게 제공하여 국민들의 疾苦를 해결해야 하는 시대적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서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百病略論”이라는 글은 그가 시리즈의 형식으로 게재한 학술논문이다. 이 글은 한의학의 기초가 되는 내용 가운데 요체가 되는 것을 기록한 것으로 질병의 원인, 증상, 치법 등 모든 글을 망라하고 있다.
그가 會務에 여념이 없음에도 매우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 있다. 평양을 방문하였을 때 만난 趙榮星이라는 50세의 여자 한의사와의 만남에 대해 기록한 ‘獨特의 女醫生’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여성에 대해 차별적 인식을 하는 과거의 습속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비판의 언사를 피력하여 여성도 韓醫業에 참여하여 의술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여성의 참여는 시대적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렇듯 金性璂는 1920년대 東西醫學의 折衷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잘 극복해나가면서 東西醫學硏究會라는 학술단체를 결성하고 『東西醫學硏究會月報』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여 한의학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 위대한 韓醫師였다.

김남일(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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