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7] 徐丙琳(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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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7] 徐丙琳(1863~?)
  • 승인 2006.06.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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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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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후진양성위해 한의학 교육 투신
朝鮮醫生會 부회장 등 역임하며 민족의학 정체성 다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 상황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으면서 삶을 영위한다. 서양의학이 들어와 서양의학이 주류의학화 되어가고 민족의학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일제시대에 한의학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친 韓醫들은 암울한 일제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한 위인들이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위인들이 손꼽히고 있지만 일제시대에 활동한 한의들 가운데 위인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인물들을 발굴하여 위인의 리스트에 올려야 할 것이다.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한의학을 연구한 韓醫들은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주류를 형성한 집단은 아무래도 儒醫들이다. 한의학의 학술을 선도한 대부분의 한의들은 본래 유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들이었지만 서양학문만을 중시하고 민족전통학문을 경시하는 사조의 변화에 맞서서 전통학문을 지키기 위해 한의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들이 민족의학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다양하였지만 학술적, 제도적 대응을 통해 민족의학을 부흥시키겠다는 뜻에 있어서는 한가지였다.

근현대 한의학의 인물을 찾다가 자료들 속에서 우연한 기회에 徐丙琳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朝鮮醫生會에서 1914년에 간행한 한의학 학술잡지인 『漢方醫藥界』2호에는 그의 이력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 기록은 徐丙琳에 대한 간략한 이력에 불과하지만 그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그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徐丙琳의 字는 智수이고, 號는 大痴이다. 그는 1863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6세부터 한학수업을 시작하여 15세에 의학에 입문하였다. 그는 26세 무렵부터 영남지방 각 처에서 의술로 이름을 드날리기 시작하여 다음해에는 각 도를 돌아다니면서 의술을 펼치었다.

1901년에는 서울에 개원을 하여 경향각지의 환자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시들어가는 한의학을 되살리고 그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후진의 양성이 절실하다고 깨닫고 한의학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 1912년 조선의사연찬회 부속 강습소장이 된 것도 이러한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1913년에도 사립의학강습소의 강사가 되어 후진의 양성에 힘썼고, 醫學講究會의 부회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가학을 좇아 한학을 공부하여 儒者의 길을 걷고자 하였으나 志於學의 나이 15세에 의학에 뜻을 두어 의학연구를 시작하여 26세에 이미 영남지방에서 이름을 떨쳤고, 30대 후반에는 서울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책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는지 분명한 기록이 보이지는 않지만 1916년 간행된 학술잡지 『東醫報鑑』 2호에 그가 講述師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1913년 東西醫學硏鑽會에서 강의된 『黃帝內經』, 『脈經』, 『醫學入門』, 『東醫寶鑑』 같은 책일 것이다. 『東醫報鑑』 2호에 기록된 講述師로는 池錫永, 趙炳瑾, 崔東섭, 洪鍾哲, 徐丙孝, 閔儀鎬, 李完珪, 田光玉, 金永勳, 張起學, 李喜豊, 朴麟緖, 林昌洙, 李峻奎, 徐丙琳, 高濟柏, 李祥源, 李承九, 張斗熙, 朴海鎭 등이었다. 이 명단에 거론된 인물들은 모두 근현대에 한의학을 빛낸 인물들이다.

徐丙琳은 1910년에 大韓醫師總合所라는 한의단체를 洪鍾哲, 趙炳瑾 등과 함께 만들면서 漢城醫師硏鑽會라는 강습소를 만들었고 여기에서 舊醫學 講師로 활동하게 된다. 이 硏鑽會 에서는 1911년 新舊醫學講習所를 부설하고 강습생을 모집하여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것은 每日申報 1911년 4월 27일자의 본문 “漢醫業從事者들은 醫術의 학술적 진보 및 在來醫術의 硏鑽을 위하여 硏學 기관으로 朝鮮醫師硏鑽會를 설립하고 회칙을 發布하고 役員을 조직”이라는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1912년에는 醫學講究會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회장 崔奎憲, 부회장 李峻奎, 총무 徐丙琳의 회장단이 출범하였다. 이 단체는 1913년에 朝鮮醫師硏鑽會와 연합하여 朝鮮韓方醫師會를 설립할 것을 결정하게 됨에 따라 명실상부한 한의사단체의 모태가 되었다. 1914년부터 일제에 의해 醫生制度가 시행되게 됨에 따라 이 때 醫生免許證을 교부받은 의생들은 더욱 강고한 단체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全鮮醫會가 그것이다. 1915년 10월 창덕궁에서 개최된 朝鮮物産共進會를 기화로 醫生들이 全鮮醫生大會를 개최하고 다음달에 全鮮醫會의 발기총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단체에서는 동년 12월에 『東醫報鑑』이라는 학술잡지를 간행하게 되는데, 여기에 徐丙琳을 講述師로 올려놓고 있다. 이것은 그가 정치적 능력보다는 학술적 능력에서 더 평가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방의약계』 제2호에도 그의 글이 나온다. 徐丙琳은 “醫門參古懲今”이라는 글에서 “크도다. 의학이여.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이에 『天元玉冊』, 『本草經』, 『內經』 등은 역사의 오래됨을 잘 나타내주는 것들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일신우일신하는 자세로 학문을 연마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한의학 본래의 면목을 제대로 파악하여 거센 외풍을 막아내고 자생적인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朝鮮醫生會의 부회장, 漢城醫師硏鑽會의 講師 등으로 활약한 그의 노력은 꺼져가는 한의학의 정체성을 새로 다지는 데에 공헌하여 이후 후진들의 한의학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계속>

김남일(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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