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세계 운남 소수민족 의학 탐방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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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세계 운남 소수민족 의학 탐방기(11)
  • 승인 2006.07.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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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족의 의학(3) - 흡수와 동화의 의학

■ 세습 ‘문파사’(文把事)

해발 2,500미터가 넘는 고원평야에 위치한 리쟝[麗江]고성은 오늘날 세계인들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여행지의 하나다. 나시족은 이 고성을 일러 ‘이고찌’나 ‘고부찌’라고 불렀는데, 이고나 고부는 큰 시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찌’는 ‘평등’을 상징하는 나시족의 신을 부르는 말이다. 즉 이고찌나 고부찌는 나시족의 ‘신시’(神市)를 가리킨다 하겠다.
이고찌 가운데 ‘이고터’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는 고성의 중심부에 가까이 있는 둔덕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오늘날 리쟝고성을 잘 아는 외국여행자들의 장기 숙소로 쓰이고 있는 오래된 서원이 하나 있는데, 이곳을 일러 사람들은 ‘서원마을’이나 ‘흥인촌’(興仁村)이라 부른다.
이곳은 원래 서원임과 아울러 15세기부터 세습하여 의술을 펴던 화양씨(和楊氏)가문의 터전이었다. 이들의 성이 두 글자인 까닭은 이들의 계보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앞의 ‘화’씨는 나시족의 성이고, 뒤의 ‘양’씨는 한족의 성인 것이다.

‘이고터’가 이들의 활동무대로 된 것은 15세기에 양훼이[楊輝]라는 사람이 호남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초빙되어온 다음부터였다. 그는 당시 남중국의 전통의학을 이어오던 의학자로서 리쟝의 통치자의 초빙을 받아 이곳에 왔고, 그 뒤 그의 의술에 감동을 받은 통치자가 세 번이나 눈물로 호소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결국 나시족의 여인과 결혼을 하고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도 나시족의 성인 ‘화씨’로 바꾸고 대대로 나시족의 여인과 결혼하여 나시족의 한 갈래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이 고성에는 재상에 해당되는 두 갈래의 직책이 있었는데, 하나는 ‘문파사’이고 하나는 ‘무파사’(武把事)로서 각각 문과 무를 맡아 나시족을 이끌고 있었다. 이 가운데 양씨 가문은 세습적으로 문파사를 맡았는데, 이런 직책을 맡는 한편 그들 가문은 대를 이어 의술을 행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 여러 갈래 전통의 결합

양씨 가문의 의학은 한편 침술을 중시하는 남중국의 의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시족 고유의 약학이나 라마교의 심리치료학 등을 결합시켜 독특한 의학체계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그들의 의학은 나시족 고유의 의학이라 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그것이야말로 나시족 고유의 의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나시족의 문화적 특징과 관련이 있다. 나시족은 어떤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내부전쟁을 겪은 뒤, 그들은 남방불교나 도교나 유교나 북방불교 등 모든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갔다.

그들은 종족의 이름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는다. 종족을 분류하는 이름도 없다. 그들의 사람 분류는 오직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 따를 뿐이었다. 즉 그들은 같은 혈통이라도 먼 곳에 살면 그곳 사람이고, 혈통이 다를지라도 같은 곳에 살면 같은 갈래의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람을 갈래짓는 구분법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따름이다. 하나는 남자와 여자로 나누는 것이고, 하나는 각 지명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혈통 중시 개념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혈통이 다를지라도 같은 곳에 살면 같은 갈래의 사람이고, 같은 갈래의 사람들이 가진 문화는 결국 같은 갈래의 문화로서 존중하여 어떤 이질감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의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중국의 의학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신의 의학으로 삼았다. 또 이를 통해 자신들의 의학적 기반을 크게 확대시켰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양씨 가문에 의해 편찬된 《옥룡본초》(玉龍本草)였다.

■ 線과 方向의 개념에서 點의 개념으로

이 시기 이전 나시족의 의학은 사람의 몸을 선과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즉 사람의 기운을 하나의 터미널로 이어진 선(맥)들의 체계로 이해했고, 그 선들의 방향에 따라 사람들의 몸을 살폈던 것이다. 그런데 양씨 가문에 의해 남중국의 의학이 들어오면서 기운의 선에 각각 그 나름의 분절점이 있다는 점(혈)의 체계를 결합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선의 체계는 중국 한족의 경락체계와 근본적으로 같으면서 다르다. 그들은 점을 배제하고 선으로만 사람의 몸을 살폈기 때문에 그 선에 대한 이해가 한족의 이해보다 구체적이고 복잡했다. 바로 그런 복잡하고 다양한 선의 이해 위에 점에 대한 이해가 보태어졌고, 이를 통해 사람 몸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결국 중국의 그것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나시족의 의학체계가 가진 특징인데, 이런 특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시족이 사람 몸의 기운이 흐르는 선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체계가 대개 과거라는 망각의 늪으로 들어갔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문헌들을 통해 그 대강은 살펴볼 수 있다.
《옥룡본초》도 그 가운데 하나이며, 이들의 결합이 반영된 ‘동파문헌’의 일부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2경락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평균 중의학의 선 개념과 달리 방향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그들의 인체 이해는 매우 흥미로운 연구 주제이기도 한데, 이 이야기를 다음 이야기의 주제로 삼을까 한다. <계속>

박현(한국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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