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0] 李峻圭(1852~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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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現代 韓醫學 人物史10] 李峻圭(1852~1918)
  • 승인 2006.12.0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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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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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후의 官撰醫書를 편찬한 御醫

1918년 5월 18일 京城(지금의 서울) 齋洞에서 腦出血로 조선의 醫人 한 분이 30분만에 숨을 거둔다. 그는 함경도 북청군 출생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나 御醫로 천거되어 조선말 고종년간에 궁중에서 조선 의술의 중심에서 의학연구에 매진한 李峻圭라는 인물이었다.

■ 사립의학강습소 소장 역임

李峻圭는 근대의 한의학 인물을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볼 자료는 극히 드물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1918년 6월 16일에 발행된 『朝鮮醫學界』 제4호에 나온다. 『朝鮮醫學界』는 公認醫學講習所에서 강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엮은 朝鮮醫學界社에서 발행한 일제시대의 한의학 학술잡지이다.
1914년 『漢方醫藥界』가 간행될 무렵 그는 私立醫學講習所의 소장을 역임하면서 한의학 교육에 투신해 대중교육에 절치부심하게 되었고, 한의학 교육을 위해 간행된 『朝鮮醫學界』가 간행됨에 따라 이 잡지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의학 교육에 투신한 것이다.

『朝鮮醫學界』 4호에 나오는 글은 李峻圭가 서거한 직후에 나온 追慕의 글이기에 그의 생애를 되짚어 볼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부족한 가운데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함경도 북청군 출신으로 의학능력이 뛰어나 고종에 의해 어의로 발탁되었는데, 청빈한 성품으로 인해 남평, 여주 등의 군수로 제수된 경력도 있었고 궁중에서는 관직이 侍從院副卿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합방 후에는 和平堂主人인 李應善이 經營하는 朝鮮病院의 院長으로 활동하면서 뛰어난 의술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 병원장 지낸 조선 말기의 어의

그는 高宗의 명에 따라 『醫方撮要』라는 책을 편찬하게 되는데, 이 책은 조선 최후의 官撰醫書라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준규는 1906년에 작성한 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우리 황제폐하께서 이러한 걱정에서 책들 가운데 번거로운 것들을 삭제하고 간결한 것들만을 취하여 대증투약에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모아서 현명한 사람이나 우매한 사람이나 모두 얻어서 사용하기 쉽도록 하셨다. ……門을 나누고 같은 부류를 모아 綱을 세우고 領을 설정하니 醫原에서부터 本草에 이르기까지 무릇 111조이다. 許浚의 『東醫寶鑑』에 의거하여 예를 들어 古證을 인용하고 지금의 病論과 用藥의 方을 그 아래에 덧붙였으니 책이 무릇 一卷이니 이름하여 『醫方撮要』라 하고 진상하였다. 대개 그 말은 간결하면서도 뜻은 다하여 대강을 들어도 세목이 펼쳐지니, 한번 펼쳐서 열어보면 마치 손바닥 무늬가 눈에 들어와 숨김이 없는 것과 같다. ……”

즉 이 책은 『東醫寶鑑』을 저본으로 하여 원리론에서부터 치료, 병증, 약물 등에 이르기까지 111개의 조문을 설정하여 醫家들에게 요약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醫原, 運氣, 經絡, 臟腑, 診脈, 形色, 傷寒賦, 運氣主病, 五運主藥, 六氣主藥 등 원리론에 해당하는 부분들은 李천의 『醫學入門』에서 따오고 있다는 점에서 『醫學入門』의 영향도 많이 받은 서적으로 보인다.

■ 고종 명받고 ‘의방촬요’ 편찬

이 책에는 1910년에 쓰여진 정만조의 서문과 1915년에 쓰여진 민영규의 서문이 붙어 있다. 이들 서문에서는 이 책의 간행이 늦어진 것에 대해 애석해 하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이준규의 뛰어난 학문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정만조는 서문에서 “우희 이시랑(이준규를 말함)의 집안은 대대로 학술로 소문이 난 집안이다. 시랑은 일찍이 가훈인 “문과 사를 이미 넓게 한다(文史旣博)”는 말을 가지고, 일찍이 세상을 감당할 것에 뜻을 두었지만 중년이 되도록 기회를 못 만나 이에 탄식하여 “옛날에 재상될 것과 의사될 것을 기도한 사람이 있었지만, 사람을 구제한다는 면에서는 한가지이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고금사방의 서적을 모아서 깊이 탐구하기를 수 십년동안 하였다. 이때에 우리 고종황제께서 生을 좋아하는 지극한 仁으로서 민중을 구제하는 베품을 생각하셔서 시랑에게 별도로 책을 짓도록 하셨는데 반드시 다 포괄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되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셨다. 시랑이 십수년간 연구한 것으로서 자신의 시험으로 징험하고 질문하여도 의심이 없는 것들을 모아 순서를 매겨 책을 만들어 『의방촬요』라 하였다”라고 감회를 표명하고 있다.

서양의학에 의해 잠식되어 무너져가는 한의학을 바로 세워 민중 속에서 자생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 속에서 만들어진 『의방촬요』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된 국가로 거듭나고자 노력을 경주한 고종황제와 어의 이준규의 민족의학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67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 이준규는 이렇듯 고종 때 太醫院典醫를 지낸 조선 최후의 御醫의 전통을 계승한 醫人이었다.

김남일(경희대 한의대 醫史學敎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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