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커 샤이드 교수와의 대화(3·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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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커 샤이드 교수와의 대화(3·끝)
  • 승인 2008.12.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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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의 통찰’ 지향하되 ‘개념의 추상’도 필요

어려서 해외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한의과대학 입학 이후 줄곧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럽게도 여느 고등학생이나 가지고 있는 ‘좋은 대학에 가야지’ 같은 그저 막연한 생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샤이드 박사는 5박 6일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민족의학신문 좌담회, 한국한의학연구원 세미나, 한의학국제박람회 국제학술대회, 동의보감 유네스코 등재기원 학술대회, 경희대학교 특강 등의 행사를 가졌는데, 나는 이 모든 행사에서 샤이드 박사 발표의 통역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한의과대학 학생으로서 앞으로 향후 한의학의 세계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구체적인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동안 한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한의학의 세계적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였는데, 이에 대한 샤이드 박사의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유럽에 동아시아 전통의학이 자리를 잡은 것은 불과 몇 십 년 사이의 일이며, 유럽에서 한의학의 영문명칭인 Oriental Medicine은 한의학보다는 중의학(TCM, traditional Chinese Medicine)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 다음으로 일본의 한방의학(Kampo medicine 漢方醫學)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유럽에 한국의 한의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며, 그나마 몇몇 사람들만이 수지침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라고 하였다.

중의학은 유럽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는데, 단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에 확산된 지식이었던 만큼 마치 뿌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줄기만 많이 뻗어나간 듯 그 부작용도 많았다고 한다. 중의학의 인체에 대한 관점이 서양의학적 접근과는 상이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환상에 가까운 기대감을 심어주었다는 것과, 중국에서 3개월 또는 6개월에 걸쳐 중국 전통의학 침술에 관한 단기집중 특강을 받고 마치 모든 치료법을 터득했다는 듯이 개업하는 침 치료사들이 많아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국가적인 지원으로 중국의 여러 의서들이 영어로 번역출간된 것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지만, 중국인들의 수준에서 번역을 하였기 때문에 서구인들이 읽었을 때 잘못 번역된 것들만 많아진 것도 문제라고 하였다. 향후 한문으로 된 의서를 영문번역할 때에는 서구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사람들 중 동아시아 전통의학을 한 사람들과 협동작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과 함께 그런 작업이 있으면 파트너로 참여할 의사도 있다고 밝혔었다. 향후 우리의 번역작업에도 참고할만한 사항인 것 같다.

한의학은 우리만의 것이며 동아시아 지역 이외의 외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이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샤이드 박사는 아시아인들도 자동차를 훌륭히 운전해내고, 생체의학(Biomedicine) 연구 분야의 업적에 아시아인들이 기여하는 바가 큰 것처럼, 동아시아 전통의학이라고 해서 서양인이 하지 못하리라는 편견은 부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한의과대학을 다니고 있는 우리도 20년 가까이 서양식 교육을 받아왔고, 과학만능주의에 맞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사실 외국인이 한의학을 공부한다면 경쟁도 치열해질 테지만 그 만큼 한의학이 다양한 관점을 채용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일정 중 한의학국제박람회 학술대회에서 “From Hierarchies to Process: Models for Integrating East Asian Medicines into Modern Healthcare”라는 제목의 발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영국의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를 인용해 동양과 서양의 인식체계를 구조적으로 비교하여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비교하여 설명한 내용이다.
서양의학이 플라톤의 인식체계처럼 관찰된 현상에서 추상적인 개념을 이끌어내는 것을 추구하는 의학이라고 한다면, 동양의학은 거꾸로 음양오행이나 기와 같은 규범적인 개념에서 관찰 가능한 현상을 통찰(insight)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의학이라고 하였다.

중국 학자의 말을 인용해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의 것(無文之文)’이 참된 진리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그렇게 본다면 ‘추상적 개념’과 ‘관찰 가능한 현상’ 간에 차등구조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도입해낸 것이 Mary Douglas의 “Group-Grid Theory”<그림>를 의학에 적용시킨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모습이 low grid, low group을 지향하지만 이것은 진료와 교육의 방면을 말하며, 이외에 연구분야에 있어서는 서양의학의 근거중심의학과 같이 high grid, high group 방향의 연구도 필요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한의학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세계화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홈쇼핑 호스트들은 자신이 파는 상품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는 것뿐만 아니라 상품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샤이드 박사는 지금도 상한론, 금궤요략 및 청대의 한문으로 된 의서들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남을 설득하려면 자신감을 내비쳐야 하고 자신감을 얻으려면 충분히 공부하고 스스로의 한의학관을 세워야지, 지나치게 현대의학에 편입되는 방향으로 한의학을 공부해나가는 것은 외국인이나 외부인들의 접근을 쉽게 해줄지도 모르지만 한의학을 왜곡시킬 수 있으니 조심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의학은 서양의학에 비해 ‘나무보다는 숲을 본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한의과대학 학생들은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과제나 시험’에만 관심을 두고 한의계의 큰 흐름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반성도 되었다. 2013년이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400주년을 맞아 동의보감의 영문번역작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지난 11월 14일 ‘동아시아 전통의학과 동의보감의 세계화’ 심포지엄에 통역으로 참석하게 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한의학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만 국제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세계화는 이제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열심히 공부하여 한의학을 배용준이나 삼성의 명성을 이을 효자 수출 상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정답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연재 끝>

정리 = 신예슬(경희대 한의대 예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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