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3)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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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23)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⑧
  • 승인 2010.07.2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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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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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료 100년 대계의 완성 

국민의료에는 틀림없이 국가가 관여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입안된 정책이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면 100년 대계를 이어갈 수 없다.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기조를 만들고 그렇게 입안된 정책을 시행하면서 국민이 그 정책에 호응해줄 면밀한 조치들을 수시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국민의료 보급이라는 명제에 치우쳐 의료수준이 전체적으로 저하되지 않도록 정책의 한 축에서는 의료의 고급화를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조선 정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조선 정부 100년의 의료정책은 일관되게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추구했다.

조선 개국 당시, 국민의료는 이미 향약의학으로 트렌드가 옮겨가고 있었다. 국민의 취향은, 배 아프고 설사할 때 삽주뿌리, 작약뿌리 등을 적당량 달여서 먹는 것이 아니라 ‘복통설사’라고 진단 받고 삼백탕(三白湯)이라는 이름의 처방에 백출, 복령, 백작약을 각 1.5돈에 자감초 5푼을 한첩 분량으로 하고 이것을 물에 달여서 하루 3번 식후에 한홉 정도를 마시고 싶어 했다. 집안이나 마을에서 내려오는 치료법이 아닌, 의학서에 기록된 보다 수준 있는 치료를 원하는 국민에게 토속적인 치료법만으로는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중국의서에 나오는 처방에 맞는 국산약재 개발을 늘여가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토속치료법을 중국의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형태로 규격화 내지는 고급화시켜야 했다. 조선 개국정부의 의료정책 입안자들은 이러한 트렌드에 직면하고 있었다.

“선조 때 허준이 짧은 시간에 많은 중국의서를 섭렵해 <동의보감>을 간행할 수 있던 것도 의료DB가 구축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태조 2년(1393)에 ‘의원’이라는 교육기관 설치를 통해 전국적으로 그러한 의료를 주도해 나갈 인재를 양성하고 <향약혜민경험방>, <향약제생집성방>을 거쳐 <향약집성방(1433)>의 완성은 국가의료 기반이 닦여가는 과정이다. <태평혜민화제국방>과 같은 중국의서와 <비예백요방> 같은 고려 전통의학서에 나와있는 의료기술을 범국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치료지침을 정부가 만들어 배포하고, 전국적인 약재 수급이 가능토록 후속조치를 이어가는 등, 향약의학을 통해 한층 고급화된 의료기술을 전국적으로 보급시키는 것, 이것이 조선의료 100년 대계의 정책기조를 만들어온 하나의 커다란 줄거리다. 그리고 성종 19년(1488) 언해본 <향약집성방>을 간행하여 반포한 것은 이 100년 대계의 완성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향약의학이 점차 기반을 공고히 해가는 것을 확인한 정책 입안자들은 재빠르게 국가의료 DB 구축으로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의방유취>이다. <의방유취>의 완성은 자국민을 위한 의료기술을 스스로 재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 이후 <창진집>, <속벽온방>, <구급간이방>, <구급방> 등 많은 구급의서가 간행될 수 있던 배경에는 <의방유취>라는 국가의료 DB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선조 때 허준이 짧은 시간에 많은 중국의서를 섭렵해서 <동의보감>을 간행할 수 있던 것도 이 의료DB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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