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4) | 조선통신사와 의학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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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24) | 조선통신사와 의학①
  • 승인 2010.07.2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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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식

함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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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의가들의 공식적 교류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이뤄졌는데, 이들의 필담창화 기록들은 使行錄에 없는 의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주로 역사학이나 국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자신들의 학문인양 많은 연구가 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조선통신사에서 차지하는 한의학의 비중이 대단히 높고, 그 내용들이 한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다른 분야 전공자가 다룰 수 없는 성질들이다. 오랜 시간 그늘에 가려졌던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의사학적 사실들이 하나씩 빛을 받도록 한의계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연재를 시작한다.

조선통신사는 조선 후기 에도[江戶] 막부의 요청으로 조선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년 간 12회에 걸쳐 일본으로 파견된 공식 외교사절로 통신(通信)이란 말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사료에 ‘통신사’ 또는 ‘일본통신사’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일본국왕사’의 상대 개념으로 ‘조선통신사’라는 명칭이 어느 정도 굳어진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여에 걸쳐 일본을 왕복하였는데, 국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행의 대표 격인 三使를 비롯하여 文士․ 醫家․ 畵家․ 典樂․ 弓手 등 당시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행해진 열두 차례의 사행 가운데 의학적으로 의의가 깊은 사행은 1682년 제7차 사행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이는 제7차 사행인 壬戌使行(1682년) 이전의 경우 交隣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대단히 강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는 상대적으로 의학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자료 역시 매우 빈약하다.

사실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조선과 일본의 국내 정치적 동기와 국제 정치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사행이 거듭되면서 도쿠가와(德川) 정권이 조선을 재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확인이 된 후에 의학 교류를 비롯한 문화 교류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醫官이 良醫와 醫員의 직함으로 일본에 파견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양국 간의 의학 교류가 조선통신사에 파견된 의가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을 살펴보더라도 1711년․1719년․1748년․1763년 사행에서 탄생된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통신사 의학 분야에 관한 연구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의학문답에 집중되어 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한일 양국 의가들의 공식적인 교류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이 만나서 남긴 의학문답 기록은 주로 필담을 나누고 싯귀를 서로 주고받는(唱和)의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필담창화 기록 가운데에는 使行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의학적 내용이 많이 담겨져 있기에 최근 관련 연구자들이 이 기록들에 대해 높은 학술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현존하는 의학문답 기록은 40여종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주제를 연구해서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이루어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들이 많다. 관련된 선행연구도 적으며, 대부분의 관련 자료들이 일본 내 도서관과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 기록에 상대할만한 조선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도 이 연구의 현실적인 문제이다.

함정식/ 청솔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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