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5) | 조선통신사와 우리의학②
상태바
Story & History(25) | 조선통신사와 우리의학②
  • 승인 2010.08.19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함정식

함정식

contributor@http://


얼마 전 제주도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고교생이 배 안에서 손발이 떨리고 의식이 혼미해지는 증상을 겪다 해양경찰 경비함에 실려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다는 보도를 접했다. 만일 그 순간 배 안에 의료인이 있었다면 응급처치가 가능했을 것이며, 환자의 예후도 응급처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훨씬 좋았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300년 전 良醫와 醫員은 위의 경우처럼 조선통신사의 사행 도중 三使(정사, 부사, 종사) 이하 모든 사행원에게 발생할 수 있던 병을 치료하는 주치의이자, 일본에 선진의학을 전해준 의학자였다.

주치의 역할이 良醫와 醫員의 기본적인 임무였지만 이것만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네 차례의 사행-필자는 이를 ‘Big4 사행’이라 칭한다-에 각 사행마다 3명씩 총 12명의 의가가 파견되었는데, 조선의 선진의학을 수용하고자 했던 일본 의가들의 다양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해주고 그들의 의학적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근대 서양의학이 보급될 때까지 일본 의가들의 필수의학 학습서로는 <의림촬요>와 <동의보감>을 비롯한 조선 의서가 주를 이루었으니,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입장에서 선진의술을 전수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당시 조선의학계의 침뜸의학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따라서 조선통신사는 일본 의가들에게 침뜸의학을 전파하는 통로가 됐다”

가령 辛卯使行(1711년) 이전 양국의 침뜸 의학 상황을 예로 들면, 임진왜란을 전후해 한국의 침뜸 의학은 크게 발전했다. 허준이 <東醫寶鑑>에서 침구편을 따로 저술했고, 허준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허임은 임상경험을 담은 <針灸經驗方>을 발간했다. 이어 사암도인이 五行針을 창안하여 <舍岩針灸要訣>을 저술하였다. 이 무렵에 이르러 조선의학계는 동아시아에서 대단히 높은 침뜸 의학 수준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통신사는 자연스럽게 일본 의가들에게 조선의 침뜸 의학을 전파하는 통로가 되었다.

주지하듯 조선이 최초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이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재편된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남쪽의 평화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조선통신사를 통해 양국 간의 절실한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등의 긴박성이 사라졌다. 그러면서 조선통신사행은 의례화되면서 문화교류라는 부수적인 기능이 부상하였다.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에게 지속적으로 유능한 의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게 되고, 조선 정부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의원(醫員)’ 혹은 ‘의관(醫官)’이라는 명칭과는 별도로 ‘양의(良醫)’라는 관직을 가진 의사들을 파견하게 된다.

현재 조선통신사에 관한 여러 연구가 진행되어, 당시의 제술관과 서기들이 일본 문사들과 시문창화 및 필담을 나누는 등 문학적 교류를 하였고, 양의와 의원들 역시 일본 의가들과 의학교류를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신유한(申維翰)을 비롯한 여러 문사들에 대한 역사학 내지 문학적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그 하나하나의 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잘 되어있으나, 의원들의 경우,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한의계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정식/ 청솔한의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