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6) | 조선통신사와 우리의학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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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26) | 조선통신사와 우리의학③
  • 승인 2010.08.2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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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식

함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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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흥전이 일본 의사들과 나눈 문답을 飯田隆慶이 정리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고방파 시조 名古屋玄醫의 제자였던 飯田棟隆이다”

조선통신사의 일행 중에 의관으로 참가한 의가 중에 백흥전(白興詮)이 있다. 1719년 己亥使行 때 통신사를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으며, 일본 측의 필담기록인 <桑韓唱和塤箎集>에 등장하는 의가 중 한 명이다. 이 기록에는 백흥전에 대해 “朝鮮醫員, 別提 白興詮(字가 君平, 號는 西蕉)” 정도로만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을 뿐, 기타 그의 생애를 더듬어볼 자료는 없다. 그나마 기해사행에 참여한 3명의 의가 중 백흥전의 행적이 상대적으로 더 알려져 있다.

백흥전은 <승정원 일기>에 총 98회 등장한다. 기해사행에 참여하기 이전의 기록이 21건이고, 나머지 77건은 사행을 다녀온 이후 기록이다. 기해사행 참여 이전 기록으로는 젊은 시절 내의원의 針醫로 활약하였던 사실, 取材에서 居首(으뜸)을 차지했으며, 의관으로 內殿, 嬪宮, 世子의 진료 때 참여한 사실 등이 있다. 이는 젊은 시절부터 백흥전이 뛰어난 의술의 소유자임을 방증한다.

사행을 다녀온 직후 백흥전은 경종대(1720~1724)에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다. 4년간 <승정원 일기>에 48건의 기사에 등장하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경종 2년(1722) 副司果를 제수받은 사실과 大殿의 진료에 참여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비변사등록>에서는 그가 奏請使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의학자로서는 드물게 당시 국제적으로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인 셈이다. 이후 영조 4년(1728) 노령으로 관직을 그만둘 때까지 어의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작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서 일본에 갔던 그는 사행기간 내내 심한 병을 앓아 자신의 의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 의사 北尾春倫 일행이 숙소를 방문했을 때 그의 병은 깊었지만, 마땅히 따로 접대할 만한 인물이 없던 터라, 의학문답이 이루어지던 자리를 뜨지도 못한 채, 옆에 누워있어야 했다. 다행히 그해의 의학 관련 필담은 다른 수행의사인 권도(權道)나 김광사(金光泗) 등이 대신했지만, <승정원 일기>의 기록만큼 풍부하고 자세한 그의 의학적 자취를 의학문답 기록에서 찾을 수 없어 무척 아쉽다.

한 가지 단편적인 일본 의사들의 기록을 통해 백흥전은 진료현장에서 직접 환자를 대하고 치료하는 臨床醫보다 주로 의학의 이치와 이론을 탐구하는 醫學者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다소 원리원칙에 철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백흥전이 일본 의사들과 나눈 문답의 내용은 의서를 공부하는 방법이라든가 고방의학에 관련된 학문적인 내용이 많다.

백흥전의 그런 문답은 飯田隆慶이 정리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고방파 시조 名古屋玄醫의 제자였던 飯田棟隆이다. 그리고 당시 문답에 참여한 일본 의가 중에 의학적 수준이 최절정에 있던 인물로 알려졌다. 이런 인물이 백흥전에게 임상의학이 아닌 기초의학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본 것은 조선통신사를 만나기 위해 몇 년 동안 준비해온 그로서는 그냥 무심코 던진 질문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함정식/ 청솔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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