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7) | 조선통신사와 우리의학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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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27) | 조선통신사와 우리의학④
  • 승인 2010.09.0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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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식

함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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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사행 당시 北尾春圃는 黃芪․附子와 같은 약재를 인삼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선 의가에게 물었다”

일본과의 교섭을 기록한 <邊例集要>에는 “듣건대 왜의 습속에 온갖 병을 치유하는 약으로 인삼을 귀하게 여기며, 무더운 여름날에는 인삼이 아니면 온 몸이 퉁퉁 부어서 죽는다고 전한다”며 일본인이 조선인삼을 중히 여겼던 풍속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대마도는 조선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동의보감>과 <의림촬요>와 같은 조선의서에 대한 요구와 함께 항상 인삼을 요구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 국왕이 막부 장군에게 보내는 예물 가운데 으뜸은 인삼으로 막부 장군 이하 주요 대신들과 지방 영주들에게 줄 선물목록에 반드시 포함되었다. 그래서 조선통신사를 태운 배는 인삼이 수백 근씩 실렸다.

한번은 조선통신사를 태운 배가 일본으로 향하던 중, 배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그 배에 실린 예물, 특히 인삼 74근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부리나케 수습한 끝에 47근은 채웠지만, 나머지를 채워 넣지 못해 급기야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말았다.

예조에 비상이 걸렸고, 인삼이 나는 계절이 아니어서 각 정부 관청에 보관하던 인삼을 모조리 그러모아도 요구량을 채우지 못했다. 결국 조정이 공금을 내어 시장에서 사 모아 겨우겨우 물량을 맞춰서 보낼 수 있었다. 인삼 때문에 조정이 그야말로 발칵 뒤집힌 사건이다. 이처럼 조선통신사 의학교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바로 인삼이다.

당시 인삼은 조선과 일본 간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의 교류에서 제일 가는 관심사였다. 의학문답 기록과 사행록으로 대표되는 한일 관계 기록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가 인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통신사 의학 교류가 이어진 18세기까지도 일본에서는 인삼이 온갖 병을 치료하는 神藥으로 여겨졌다. 여기에 인삼무역이 막부 재정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요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특히, 막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인삼의 자체 생산을 위하여 대단히 노력하였다.

요시무네는 인삼에 관한 種子와 種生 방법을 터득하려고 많은 시도를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때문에 그는 조선통신사의 교류를 인삼의 자체 생산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 이용하였다. 德川吉宗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우수한 본초학자와 의가들을 불러모았다. 하야시 료키(林良喜) 니와 세이하쿠(丹羽正伯) 노로 겐죠(野呂元丈) 등이 그 대상자들로, 모두가 요시무네에게 협력하여 인삼의 국산화에 노력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의가들과 의학문답을 했던 핵심 인물들이다.

이외에도 조선과 일본 의가들 사이에 이루어진 거의 모든 의학문답에서 인삼을 주제로 삼았다. 특히, 신묘사행 당시 北尾春圃는 黃芪․附子와 같은 약재를 인삼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선 의가에게 물었다. 이는 인삼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나 이에 공급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인삼 대용품을 찾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 인삼이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함정식/ 청솔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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