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9) | 조선시대 구급방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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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29) | 조선시대 구급방서들
  • 승인 2010.09.1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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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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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전염병이 창궐하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마을은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산적이 되거나 화전민이 되고…. 언젠가 드라마에서 한 번쯤 본 기억이 있는 장면들이다. 관람자는 극적이어서 흥미롭겠지만, 막상 도망치는 당사자나 그걸 지켜보는 보건 당국은 피가 마르지 않았을까.

필자가 2003년 북경에 있을 때다. SARS(중국어로 非典刑性肺炎. 줄여서 ‘非典’)가 한창 유행이던 4월인데, 소문이 점점 흉흉해지더니 급기야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며칠 후 북경시장이 방송에 나와 이제부터는 북경의 사스환자의 상태를 거짓 없이 공개하겠다고 선언하고 현재 북경 내 환자는 100여명이라고 밝혔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헌데 그날부터 환자는 매일 100여명씩 증가했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소위 말하는 패닉이 시작되었다. 주요 관공서를 제외한 상가는 철시하기 시작하였고 마트의 상품들은 깡그리 사라졌다. ‘북경 탈출’이란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공항과 버스터미널, 기차역이 최대 전염 위험지역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몰려들었다. 당시 해외 언론들은 이 장면을 취재해 전 세계로 송출했다.

이쯤 되면 전염병은 더 이상 질병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전복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른다. 중국 정부의 최대 관심사는 환자의 치료보다도 패닉상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관영방송주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스컴에서는 전염병 관련 모든 정보를 반복적으로 쏟아냈다. 그리고 정부는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거의 모든 물자를 북경으로 쏟아 붓다시피 했다(2003.4.24~5.1 8일간 북경으로 유입된 주요 품목: 쌀 19,717t, 밀가루 1010t, 소금 3576t, 마스크 1,343,000개 등-中華醫史學會誌 2003년 7월호). 간이건물 형태의 3000병상의 사스 전문 격리병원을 북경시 외곽 멀리에 별도로 지었고(건축기간 10일) 의료진의 피로를 막기 위해 전국 각지의 군의관, 간호장교들이 불려와 대기했다. 환자 발생이 보고되면 곧바로 발생 주소지 블럭은 바리게이트가 쳐지고 사람들은 사전경고 없이 최대 잠복기인 14일간 감금되었다. ‘非典’이라는 두 글자가 몇달 동안 모든 행위의 판단기준이 됐다.

“언해구급방‧ 벽온방‧ 창진집 등은 백성과 보건 당국의 애끓는 심정과 사연들을 직간접적으로 품고 있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대처방식은 달랐겠지만, 국민의 패닉상태를 대하는 심정은 마찬가지였을 듯하다. 관리를 파견하고 병력을 늘려서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환자를 격리시키고 식량을 공급하고 의료진과 의약품을 실어 보내야 했다.

그리고 부족한 의료진을 대신할 수 있는 간편한 진료지침서를 배포했다. 진료지침서는 비상시를 대비해 간행한 것도 있고 상황에 닥쳐 찍어낸 것도 있다. 더러 간행본이 모자라 손으로 써서 나눠주기도 했고, 개인이 만약의 경우에 쓰기 위해 필요한 것들만 베껴서 보관해 두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구급방> <언해구급방> <간이방> <구급간이방> <벽온방> <창진집> <신벽온방> <속벽온방> 등을 비롯해 각양각색의 수많은 조선시대 구급의서들은 그런 사연들을 하나씩 직간접적으로 품고 있는 기록이다. 허접해 보이는 필사본 글씨에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처방문이 몇장 담겨있다고 우습게 보지 마시길, 그 정보가 얼마나 많은 인명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으니….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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