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35) | 文治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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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35) | 文治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①
  • 승인 2010.11.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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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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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문약(文弱)했던 나라이다. 문약했기 때문에 두 번의 병란을 겪었고, 중국과 국경 분쟁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한말에 열강들이 왔을 때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문약했기 때문에 불행한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문약하지 않았던 일본은 어땠을까?

豊臣秀吉이 1590년 일본을 통일할 때까지 약 200년 간 내전으로 시달려온 그들은 불쌍하지 않았을까? 전쟁터에서 태어나고 전쟁터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까지 뒤져도 온통 전쟁에 대한 기억밖에 없던 그 사람들은 불쌍하지 않은가? 전투병들은 그렇다 치고 전쟁 뒷바라지를 했던 여자들은 어땠을까? 인간 취급이라도 받았을까?

아주 오래 전에 본 일본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산에 내다버리고, 여자아이는 키운다. 남자는 무사로 키우기엔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드는데 비해, 여자는 조금만 키워도 부리기 쉽고 여러 모로 쓸모가 많아 부잣집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내전 당시의 풍습이다. 자기 아이를 버리고 파는 것이 한때의 엽기적인 사건이 아닌 한 부류의 풍습이 되어버릴 정도면 충분히 불쌍하지 않은가?

1592년 임진년에 조선에 건너온 일본군은 그런 희생을 바탕으로 200년 동안 단련된 전쟁기술을 나면서부터 체득해온 ‘전쟁 귀신’들이었다. 게다가 조총도 한 자루씩 가진. 우리는 간혹 조선 당쟁의 피해를 언급하면서 이율곡의 10만양병설이 당파의 이기심 때문에 거부되어,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한 것처럼 아쉬워하지만, 그렇게 단련된 프로병사 16만명을 기껏해야 한 달에 몇 번 제식훈련 정도 받았을 것이 자명한 10만 군대가 과연 맞설 수 있었을까?

“의서습독관, 의녀, 내의원제도 등은 조선의 의학문화 전통이며, 조선이 문치주의를 지향했기에 가능했던 제도다”


오히려 싸움이라곤 증조 고조를 다 뒤져도 동네 양아치들하고 치고 박고한 기억밖에 없던 우리 선조들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을 진퇴양난의 교착상태로 몰아간 것, 전쟁 귀신들과 ‘맞짱’ 떠서 절대 밀리지 않던 이순신과 그 휘하 병사들, 서울을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오는 와중에도 파병 지원을 받아낸 조선 정부의 외교력(명나라는 여진족의 압박과 재정 곤란으로 애당초 파병 반대 입장이었고, 결국 파병을 관철시킨 병부상서-石星[?-1599]은 수감되어 감옥에서 병사하고 두 아들은 조선으로 망명- 성주석씨, 해주 석씨의 유래, 명나라는 얼마 후 멸망), 이러한 놀라운 위기 대처능력을 보여준 당시 조상들에게 오히려 경의를 표해야 되는 건 아닐까?

병자호란도 마찬가지다. 칭기즈칸과 같은 배경에서 자라온 그들을 어지간한 무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었다. 무력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두 차례의 큰 국가 위기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문화의 힘으로만 500년을 지탱해온 나라였다. 군대는 물론이고 경찰력도 그렇게 많을 필요가 없었다. 잘 조직된 향촌사회가 충분히 그 기능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야기하려는 조선시대 의서습독관, 의녀, 내의원제도의 특징은 조선의 문치주의에 입각한 우리의 우수한 의학문화 전통이며, 전혀 중국적이지 않던, 조선이 문치를 지향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제도들이다. 조선이 문치(文治)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국가였다는 시각을 갖지 않으면 조선과 관련된 모든 것은 무가치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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