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36) | 문치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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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36) | 문치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②
  • 승인 2010.11.11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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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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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에는 수많은 벤치마킹의 사례가 있다. 신라는 당의 제도를 벤치마킹했고, 고려 말에는 원나라 정부의 과학기술을 들여와 벤치마킹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벤치마킹 사례는 너무도 많다. 벤치마킹을 함으로써, 시행착오에 들이는 시간과 경비를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식 질서에 입각한 고려 왕조의 체제를 뒤엎고 새로운 유교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조선 초기 정부 관계자들은 절대적으로 중국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벤치마킹의 대상은 북송 정부가 세운 중앙집권적 정치질서였다. 북송은 정부 관리를 순전히 과거제도로만 선발하면서 권력구조를 재편했고, 군인의 순환근무제를 채택해서 지방 군벌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했다. 권력의 요직에 있으면서 자기 사람을 많이 두고 군부의 통수권자이기도 했던, 그래서 누구와도 권력을 나눌 필요도 의지도 없던 이성계는 이러한 북송 정부의 강력한 중앙집권 정치체제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의 정치 행정체제는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바로 되는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 三國志의 張飛가 巴西의 태수를 하던 시대보다 이미 천년이나 지난 시대이며, 체제를 세부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전문인력들이 없으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조선에는 훈련원에 무경습독관, 승문원에 이문습독관, 사역원에 한학습독관, 관상감에 천문학습독관, 장악원에 예악습독관을 두었다. 그리고 전의감에는 의서습독관이 생긴 것이다(김중권, 조선초 의서습독에 관한 연구. 정다함, 조선 초기의 습독관 연구).

“의서습독으로 내의원 의사가 되고 왕의 신망을 얻어 도성 주변 수령으로 나가는 현상은 당시 양반 자제들의 출세 코스 중 하나였다”

이 습독관들이 하는 일은 말 그대로 글로 된 정보를 해석하고 받아들여 조선 식으로 다시 가공하는 것이다. 초기 형태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든다는 정도였겠지만, 이들의 세밀한 조력이 없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500년을 지탱할 정치구조를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습독관이라는 명칭이 공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세종4년(1422) ‘武經習讀官’이 처음이다.

그러나 김중권 교수의 견해처럼 태조2년(1393) 각 도에 의학교수를 두고 양반 자제를 교육시키는 것 자체가 의학에서의 ‘習讀’의 효시라고 본다면, 공식 명칭 이전에 조선 정부의 모든 분야에서 습독의 직분을 수행해온 관료조직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도전 조준과 같은 개국공신에서 시작해 맹사성 변계량 같은 조선 과거제도 출신자 1세대들, 성삼문 신숙주 같은 집현전 관료는 모두 이들 습독관의 힘을 빌어 조선을 만들어간 사람들이다. 습독관이 가져오는 지식 정보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는 이들 고위 관료의 몫이었다.

한편 ‘습독’ 직분을 수행하면서 쌓은 지식으로 과거에 합격해 다시 습독관을 부리는 고위 전문직 관료가 되는 것은 이들에게 또 다른 특권이었다. 더욱이 의서습독을 통해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이용해 의과에 급제해 내의원 의사가 되고 거기서 왕을 보필하면서 신망을 얻어 도성 주변(왕이 호출하면 하루 내로 도성에 도착해야 하는 거리)의 수령으로 발령을 받아 나가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당시 양반 자제들의 출세 코스의 하나였다(이규근, 조선 후기 내의원 연구). 우리는 혹시 조선시대의 의사가 중인계급으로서 양반들이 천시하는 직종이었다고만 알고 있지는 않은지….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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