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37) | 문치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 ③
상태바
Story & History(37) | 문치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 ③
  • 승인 2010.11.18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웅석

차웅석

contributor@http://


의서 습독관, 문헌분석 외 임상응용 가능성 검증

우리가 대왕세종을 성군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세종 개인의 인간적인 면보다는 세종 재위기간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업적들이 쏟아지다시피 나오기 때문이다.
한글창제, 아악정리, 지리지완성, 국경정비, 법전완성, 과학기구발명 등. 의학 분야에서도 한국한의학의 4대 의서 중의 2종인 『鄕藥集成方』과 『醫方類聚』가 세종 때 그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세종 개인에게 그 공헌을 모두 돌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할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세종 초기에 이루어진 업적들의 대부분은 조선 태조와 태종 때부터 시작해온 나라 만들기 사업이 그 결실을 맺은 것이며, 세종 후반기에 이룬 업적은 병석에 누운 세종을 대신해서 문종이 왕세자시절에 이룬 업적들인 경우가 많다.

그밖에 역사기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공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역사적 시각으로 한국한의학의 주요업적인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醫書習讀官’이라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향약집성방』은 1431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3년만인 1433년에 완성되었으며, 10706종의 처방과 1416종의 침구치료법이 실려 있으며, 언급하고 있는 질환종류는 959종에 달한다. 703종의 국산약재만으로 국가의료의 근간이 될 텍스트를 만들어야했던 당시 의학담당 관리들이 당대의 중국의서와 조선의서를 분해하다시피해서 고심해서 만들어낸 의학서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향약집성방』은 특별한 증보증편 없이 『동의보감』이 그 역할을 대신할 때까지 수차례 간행되었다. 국가의료의 치료기술DB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의서습독관들의 치밀하고 엄정한 작업이 아니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수년에 걸쳐 회의와 토론, 생각에 생각, 먹갈기와 필사와 가위질과 풀질을 무수히 반복해가면서 만들어낸 작품인 셈이다. 그들이 의학텍스트를 분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임상응용가능성까지도 검증했다고 한다면 그 엄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강연석, 향약집성방의 향약의학연구]

의서습독관이 언제 설치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주장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다른 기관의 습독관들이 설치된 세종집권 초반기에는 이미 정부 직책의 하나로 자리잡아 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의서를 읽은 관리’라는 의미에서는 이미 조선 태조2년(1392) 『향약혜민경험방』을 간행한 고위 관료 김희선과 그의 휘하 관원들이 습독관의 효시이겠지만[김중권, 조선 초 의서습독에 관한 연구], 양반이라는 신분적 하자가 없음에도 핵심권력에서 배제된 가문의 ‘양인자제’들이 기술관으로서 공직에 진출하기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정부관리 직책으로서의 의서습독관은 세종 때부터라고 보여진다. [정다함, 조선초기의 습독관연구]

왕조실록 등의 역사기록은 어느 의서습독관이 어떤 집안의 누구아들이며 언제 시험에 합격했는지, 혹은 그 둘 중 누가 치료를 잘못해서 견책을 받았으며, 누가 뇌물수수혐의로 면직되었는지를 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의서습독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너무 당연해서 혹은 필요가 없어서 기록하지 않은 역사의 행간을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차웅석/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