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05) -「劉爾泰麻疹方」
상태바
고의서산책(505) -「劉爾泰麻疹方」
  • 승인 2011.09.22 11: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상우

안상우

contributor@http://


山淸사는 용가리처녀 치험례

 

일제 강점기인 1931년(소화6) 진주에서 간행한 마진치료 전문서로 산청의 명의 劉爾泰(1652, 효종3∼1715, 숙종41) 원작을 후대 朴周獻이란 인물이 목활자로 간행한 책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개략을 소개한 바 있다.<고의서산책 187회, 鄕村山谷을 疹疫에서 구할 방편 - 「劉爾泰麻疹篇」, 2004년 2월 2일자 / 82회, 설화 속에 살아있는 名醫, 劉爾泰 - 「麻疹編」, 2001년 8월 27일자>

하지만 시간도 많이 흘러 독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린 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몇 년 새 후손의 끈질긴 노력으로 새로 찾은 사적이 적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더 소개할 기회를 갖고자 한다.

또 진즉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한 「實驗單方」(1709년작)<287회, 口傳說話에서 걸어 나온 실험의학자, 2006년 4월 10일자 / 288회, 갖가지 신기한 鄕藥 治驗錄, 2006년 4월 17일자>의 번역판이 2010년 연구원에서 ‘전통의학 고전국역총서’ 가운데 하나로 번역이 완료되어 세상에 선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인연으로 오래 전에 인사를 나누었던 후손과도 다시 연락이 닿아 우리가 펴낸 「국역 실험단방」 발행소식을 전했더니 한걸음에 달려와 기뻐하였다. 또 그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麟西聞見錄」을 일본까지 찾아가 親見했다면서, 그간 조사한 유이태 선생의 사적을 내밀었다.

新淵堂 혹은 麟西, 猿鶴山人이란 호를 썼던 저자 유이태는 조선 후기 국왕을 진료하고 議藥同參으로 임명되었으며, 적지 않은 의서를 남겼건만 그런 분의 행적을 드러내어 조명하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어서야 참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또 「내의원선생안」에 ‘安山崇祿’이라 적혀 있으니 그가 안산군수와 숭록대부의 職品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직을 받고 부임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전에 쓴 글에서는 기존의 견해에 따라 저술연대를 1786년으로 썼으나 최근 후손이 제공한 자료와 생몰연대(1652∼1715)를 상고해 보면 대략 1700년경으로 잡아야 타당할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진주에서 간행한 목활자본 서문(丙午)에 오류가 있어 저술연대를 추정하는데 왜곡이 빚어졌던 것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사본으로만 전해져 오는 과정에서 轉寫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柳義泰, 劉以太 등 유사한 이름으로 명의의 史績과 傳說이 서로 뒤엉켜 후대에 혼란이 야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30년 발행자 박주헌에 의하면 당시로부터 20여 년 전 저자의 후손이 家傳本을 전해주어 사용해 보니 백발백중이었기에 책을 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으니 그에게 사본이 전해진 것은 대략 1905∼1910년경으로 보인다. 그가 남겼다는 많은 분량의 저술과 서책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전화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몹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짤막한 의안 하나, 1692년(壬申, 숙종18) 겨울, 산청에 홍역이 휩쓸었던 모양이다. 14살 처자가 마진을 앓았는데 미처 다 낫지 않고 열독이 안으로 들어가 위가 헐고 입으로 연기가 새나와 마치 쥐구멍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消毒飮이나 牛黃膏를 주어보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다급한 가운데서도 가만 헤아려 보니 불을 끄는 데는 물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無價散을 4~5대접 먹였더니 연기가 잦아들었다.

한참이 지난 후 다시 연기가 새고 숨이 차서 위태로운지라 野人乾 찹쌀차를 5주발 먹였더니 비로소 연기가 그치고 반점도 사라졌다. 300여 년 전 이 땅에서 겪었던 무시무시한 전염병 얘기가 유이태의 손끝에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