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비평 -「무문관 참구 : 간화선 수행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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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 -「무문관 참구 : 간화선 수행의 교과서」
  • 승인 2012.09.2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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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돈

김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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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길잡이

 

장휘옥, 김사업 著
민족사 刊
공안(公案)을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간화선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나침반이 공안이다. 「무문관」은 간화선 수행의 교과서로 무문 혜개(無門 慧開)가 완성한 것인데 간화선을 확립한 대혜 종고(大慧 宗杲)가 입적 후 65년이 지난 일이다.

이 책은 한때 불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두 저자가 7년 동안 외딴섬 오곡도에서 처절한 수행을 통해 얻은 알맹이들을 엮은 것이다. 본칙, 평어, 송 각각에 대해 선종 전통 방식으로 제창하였고, 두 저자는 불교를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부처님 말씀과 실제 자신의 행동에 괴리를 발견하고 문제가 무엇인지에 깊이 침착했다.

해서,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선방을 찾아다녔다. 혹독한 추위에도 불기 한 점 없는 선방에서 하루 15시간 동안 좌선을 하는 일본 임제종의 고오가쿠지(向嶽寺)선원. 그곳에서 화두를 들고 치열하게 수행했다. 그들의 깨달음이 「무문관 참구」에 그대로 녹아 있다.
피부에 와 닿는 내용들로 선수행을 하는 이들은 진가를 알고 선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좋은 안내가 될 것이다.   

이 책의 첫 번째 특징은 2003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임제종 14 대본산 가운데 하나인 고오가쿠지(向嶽寺)의 안거 용맹정진에 일 년에 서너 번은 반드시 참가하고, 때로는 안거 기간 중 장기간 체재하면서 미야모토 다이호오(宮本大峰) 방장 스님의 독참 지도를 받아왔다.
900여 회에 달하는 독참을 통해 체험을 바탕으로 머리 굴림이나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고 공안을 공안답게 올바로 참구할 수 있게 내용과 구성에 힘을 쏟았다.

두 번째 특징은 공안(화두) 하나를 완벽히 뚫으면 1천7백공안이 즉석에서 다 뚫린다. 이 공안을 뚫었다 싶어도 저 공안에는 막혀 버린다. 하지만 독참 제도가 없다면 여러 공안을 뚫어나가는 수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뚫어야 할 공안’이라고 밝힌 화두는 일본 임제종에서 수백 년간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적인 참구 공안이다. 그리고 저자들이 독참을 통해 수행하면서 실제로 뚫은 공안이기도 하다.

세 번째 특징은 선의 정신과 공안 참구의 핵심이 드러나도록 현재형 서술을 했다. 선은 지금 이 순간을 100퍼센트로 사는 것이다. 즉, 이 순간을 싫다 좋다 등으로 쪼개지 않고 이 순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공안도 이 순간의 내가 공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공안 참구의 핵심이다. 공안 속의 등장인물을 바로 이 순간의 내가 그 상황의 그가 되어 공안 속의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안은 생명 없는 옛날이야기나 문학작품으로 끝나 버린다. 공안 속의 말과 행동은 지금 내가 하는 것이고, 평어와 송과 제창은 바로 지금 나의 일(己事)이니 당연히 현재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순간 이 자리의 자기를 이탈하면 선은 없다고 강조한다.  

본문의 몇 가지 대목을 살펴보자. 제1칙 ‘조주구자’에 입실 구절에 보면, 방장 : ‘무’를 보았느냐? 김 : 보는 자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방장 :  설명은 필요 없다. 보았으면 본 것을 그대로 보여라. 자, 어떻게 보이더냐? 김 : ……. 방장 : ‘무’가 되는 것은 자신을 잊은 듯한 기분이 되는 게 아니다. 하물며 그 기분을 설명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한 점 남김없이 ‘무’에 죽어라. 대보리심을 가지고 지지 말고 해봐. 형체가 없는 ‘무’, 보일 방법이 없는 ‘무’를 보이라니!

 제35칙 ‘천녀리혼’에서 달빛에 감싸인 계곡과 산은 하나인가, 둘인가? 같은가, 다른가?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똑같은 달빛이다. 하나라고도 둘이라고도 할 수 없다. 누가 두 천녀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가? 원래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온 천하는 각각 다른 모습의 천녀인 것을. 심안을 가진 자에게는 모든 것이 그대로 진실이다. 서면 선 자리가 진리의 한복판이고, 앉으면 앉은 자리가 그대로 우주의 중심이다.

 제41칙 ‘달마안심’에 이조(二祖)가 눈 위에 서서 팔을 자르고 말한다. “제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부디 편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천오백년 전의 혜가 혼자만의 원(願)이 아니다. 고금을 통해 목숨을 건 수행자 모두의 절규이다. ‘안심(安心)’은 본래의 편안함이다. 이는 잃어버린 적이 없어 새삼스레 찾을 필요도 없는 진실한 자기 모습이다. 지옥에서도 극락에서도, 손해를 보아도 큰 병에 걸려도 편안하다. 이 이야기가 허구일지라도 목숨 걸고 고난 수행을 해본 자에겐 이런 구도의 열정이 허구의 이야기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황룡삼관에 보면 「무문관」48칙이 험난해서 참구하고 참구해도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공부인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하여 어떻게 해서든 이 관문을 뚫어 대자유를 얻게 할 것이다. 원망하고 또 원망해서 원망이 없어질 때, 온 천지는 청풍(淸風)으로 뒤덮일 것이다.

종수는 이 ‘사무치는 한(恨)’을 발판으로 대오하여 천하를 밝히라고 제자들을 질타 격려한다. 제30칙 ‘즉심즉불’에 공안은 한 칙만으로도 충분하다. 깨달음에 둘이 있을 리 없으니까. 다만 철저하고 분명하게 꿰뚫을 것을 요할 뿐이다고 하였다. 요즘이 힘든 시기지만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숙독을 권하고 싶다. (2만 2천 원)

김진돈 / 서울시 송파구 운제당한의원장, 송파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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