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 기록 유물, 의학사는 물론 생활사적 가치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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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 기록 유물, 의학사는 물론 생활사적 가치도 높다
  • 승인 2014.11.0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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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희 기자

홍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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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강 김영훈과 송재 이종형’ 주제 정기학술대회

국가등록문화재인 ‘청강 김영훈(晴崗 金永勳)’과 그의 수제자 ‘송재 이종형(松齋 李鍾馨)’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지난달 29일 경희대 중앙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한국의사학회(회장 김남일) 주최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안상우 박사(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의 ‘청강 김영훈 기록유물의 의사학적 가치’와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의 ‘송재 이종형’ 연구발표의 내용을 발췌요약했다. <편집자 주>


근대 생활사 사료로 평가…근대 상업경제사에서도 주목

▶안상우 ‘청강 김영훈 기록유물의 의사학적 가치’

청강 김영훈(1882~1974)은 근현대 한의학 역사의 증인이다. 순종의 어의를 지내 황실의학의 전통을 계승했다. ‘청강의감’ 등의 의안자료와 미완고 ‘수세현서’가 있으며 보춘의원 진료부 12만장을 남겼다. ‘擧形名論하여 告天下人士’ 등 많은 논고를 남겼으며 ‘동의보감’ ‘동서의학보’ ‘동양의약’ 등 의학잡지도 발행했다.

◇청강의감

철저한 기록과 보존 습관을 보인 청강의 유물 일체는 성북동 자택에서 장자 김기수 씨가 보관했으며, 진료부 및 의약관련자료는 수제자 이종형 교수가 보관했다. 이 유품은 1999년 경희대 한의대에 기증됐다.

청강의 진료기록물은 1912년 8월 근대문화재 등록 503호로 고시됐고, 이어 1913년 4월 진료기록물 955권은 국가기록물 제7호로 지정됐다. 구황실 전의자료인 ‘전의임명장’, 비망기 ‘일기초’ ‘수록초’ ‘초일기’ 등이 있으며 회계철인 ‘경비기입장’ ‘수입부’ ‘수출입별록’ ‘장부’ 등은 의사학적 가치 뿐만아니라 근대 상업경제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참고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청강의 진료기록물은 전통지식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값지다. 역대의학인물 발굴과 명의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건국수립 시기 의료계의 활동상이 보전돼 있는 등 근현대 의학사료의 보존의 의미가 있다. 근대 생활사 사료로서도 평가받으며, 대표적 의학문화 콘텐츠로도 남게 됐다.

생활사적 가치로는 ▲내원환자의 주소와 연령 직업 관련한 질병이 기록돼 있는 명의의 평생진료기록이기 때문에 당대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필수 자료다. ▲특히 청강은 경성 중심가에서 최고의 국수로 인술을 펼쳤기에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의 진료기록이 들어 있다. ▲당시 물가 등 경제상황과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일기와 장부류에 정확한 수치로 기록해 놓아 생활사 측면에서 매우 보존가치가 높다.

기록물에 등장하는 처방을 책으로 엮은 청강의감은 2001년 현재 5판까지 중판할 정도로 한의학에 활용도가 높으며, 임상강의록이 현장에서 교재로 활용될 정도로 정평 있다. 진료기록물은 활용시스템으로 확대해 치료율을 제고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청강의감’ 펴낸 송재는 어떤 인물인가

▶김남일 ‘송재 이종형’

송재 이종형(1929~2008)은 청강의 수제자로 스승의 유고를 모아 1984년 「청강의감(晴崗醫鑑)」을 펴냈다. 이종형은 1949년 청강의 문하생이 돼 지도받기 시작했다. 청강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증조부가 청강과 개인적 친분이 있어 천거하였기 때문이다. 청강은 이종형을 지도하면서 동양의약대학에 입학하도록 배려했으며, 이종형은 1955년 한의사 국가고시에 수석합격했다. 청강은 이종형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의식주와 학비 일체를 보살펴줬다.

이종형은 청강으로부터 「의학입문」을 지도받아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학문을 정리했다. 그는 1962년 보인한의원을 개원하면서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했다.

그의 저서로는 「한방병증분류」「한방내과학」「현대동의학사」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동양학의 원리’ ‘동의학개발론’ ‘한의학의 현재와 미래’ 등 많은 연구 저작물을 남겼다. 그 가운데 「청강의감」은 스승 김영훈의 평생 동안의 진료 기록 가운데 유효처방을 모아서 만든 역작이다. 「현대동의학사」도 근현대 한의학의 역사를 거의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훌륭한 논문이다.

그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대한한의학회 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하는데, 이것은 그의 학문적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경희대 교수를 지냈으며, 1975년 일본동양의학회 회원, 1976년 대만중의사회 고문 등에 위촉되기도 했다.

송재는 특별히 근현대 한의학사에 천착해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1977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현대문화사대계’에는 ‘한국동의학사’라는 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송재는 한의 진료의 내실에도 앞장섰다. ▲한방 내과학, 소화기계 질환에 대한 연구 ▲고혈압, 담병 등에 대한 연구 ▲요통, 통풍, 통비, 관절풍, 관절종통, 경악방, 어혈 등에 대한 임상보고 ▲소아 한약에 대한 연구 등 끊임없이 탐구했다.

송재는 또한 ‘한의학의 세계화’라는 주제에 대해 크게 고심했다. 대한한의학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전통의학에 대한 세계적 관심과 아울러 한의계가 세계침구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낸 것에 고무된 분위기를 살려 한국한의학의 세계화를 이루어낼 방법을 찾고자 애썼다.

그는 서거하기 전까지도 근현대 한의학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구리시 집에서 연구를 계속해 왔다. 스승이 소중하게 간직해 온 자료들과 그 기억을 정리해 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역사로 전달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다.

정리=홍창희 기자 chhong@mj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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