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醫學遺蹟 探訪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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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醫學遺蹟 探訪記(8)
  • 승인 2004.03.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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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① 안국 약왕묘의 북명의전 입구. ② 북명의전에 모셔진 명의들의 塑像. 왼쪽부터 孫林, 華타, 張介賓(景岳), 張子和, 劉河間. ③ 남명의전에 모셔진 명의들의 塑像. 왼쪽부터 張仲景, 孫思邈, 皇甫謐, 徐文柏, 扁鵲.

윤 창 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안국 명의전

이 비동의 무덤 양쪽에는 名醫殿이 있다. 역시 10대 명의가 塑像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임구시 막주진의 편작 사당에 모셔진 10대 명의와는 좀 차이가 있다.

10대 명의

북명의전(墓亭을 마주 보고서 왼쪽)에는 孫林, 華타, 張介賓, 張子和, 劉河間 등이 모셔져 있고, 남명의전(묘정을 보면서 오른쪽)에는 張景岳, 孫思邈, 皇甫謐, 徐文柏, 扁鵲 등이 모셔져 있다.

兩殿의 회랑벽에는 각각 두 종류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南殿의 동쪽에는 장중경이 太守로 있을 때 매달 초하루와 15일에는 일체의 公務에서 손을 놓고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병을 진료하여 백성들이 그를 ‘坐堂先生’이라 칭찬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서쪽에는 편작이 괵태자를 치료하여 起死回生 시키고 사람들이 기뻐서 뛰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北殿의 동쪽에는 화타가 관우를 위해 뼈를 긁어내어 독을 치료하고 관우는 바둑을 두면서 얼굴색이 평소 같으며 화타는 치료하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고 군사들은 그릇을 가지고 피를 받으며 눈을 가리고 감히 쳐다보지 못하는 상황을 그려 놓았고, 서쪽에는 의학의 경험을 총괄하여 千金方을 저술하는 손사막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大殿과 后殿은 모두 명나라 永樂年問(1404년)에 세워졌는데 대전에는 3.5m에 이르는 藥王의 坐像이 안치되 있고 后殿에는 藥王과 靈婉, 靈淑의 두부인이 함께 모셔져 있다.

중약재의 중심 안국

약왕의 추숭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약재 상인들은 분분히 여기에 모여서 교역을 하였고, 안국은 곧바로 藥界의 聖地가 되었다.

안국은 약재교역 뿐만 아니라 중약재 가공업이 발달하여 “약이 기주를 거치지 않으면 약미가 없다”, “풀이 안국에 와야 비로소 약이 되고 약이 기주에 와야 비로소 향이 더해진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약왕묘 안에는 특이하게도 원대의 대표적인 희곡 작가 關漢卿에 관한 유적을 보존하고 있다. 관한경은 安國市의 伍仁村사람으로 號는 已齋수라 했는데 金末 元初(1227~1297)의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太醫院尹을 역임한 적이 있으므로 한의학과 무관한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는 馬志遠, 白朴, 鄭光祖와 함께 元曲四大家의 한사람으로 이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雜劇 60여 종류를 창작했는데 지금 현존하는 것은 《竇娥寃》 《救風塵》 《拜月亭》 《單刀會》 《蝴蝶夢》 등 18종이 있는데 두아원은 지금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우리가 안국에 도착한 것은 오후의 늦은 시간이라 약재를 거래하는 현장을 참관할 수가 없었다. 약재의 경매는 오전에만 이루어진다고 한다.

우리는 약왕 빌딩 등을 둘러보면서 약왕상 앞에서 사진도 찍고 약을 판매하는 상점 한 두 개를 둘러 본 뒤 1박하기로 예정된 석가장시를 향해 차를 달렸다.

하북성 중심 石家庄

우리 일행은 석가장에서 1박 했다. 석가장시는 80년전 만해도 獲鹿縣의 小村莊이었다가 京廣線(北京~廣州), 石太線(석가장~太原), 石德線(石家庄~산동德州)의 철도가 부설됨으로써 교통의 요지가 되어 발전한 신흥공업도시이다.

1968년 保定에서 이곳으로 河北省 省會가 옮겨짐으로부터 명실상부하게 하북성의 정치·경제·문화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튿날 아침 비가 약간 내리는 가운데 우리는 석가장시를 떠나 조금 북쪽에 있는 正定縣으로 향했다.

석가장에서 나온 조선족 현지가이드가 버스 속에서 이동원에 대해서 해박하게 설명을 하여 우리는 정정현에 가서 동원선생의 유적을 참관한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버스가 정차한 후 가이드는 우리를 내리게 하고는 고건물 안으로 들어가 관람을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곳은 이동원 선생의 사당이 아니라 공자의 사당이었다.

나는 대단히 실망을 하여 우리가 원하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하며 항의를 하자 가이드는 전화로만 알아봤는데 자기는 이곳을 이동원 사당으로 알고 안내를 했다는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었고 부풀렸던 기대감이 한 순간에 참담한 심경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동원 선생의 유적을 보기 위해서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하여 이곳까지 어렵게 왔다고 하소연 해 보았지만 자신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실망스런 대답뿐이었다.

‘아! 이곳까지 와서 이동원 선생을 못 만나고 돌아가는구나’ 너무나 허탈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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