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이민생활과 의료현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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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이민생활과 의료현실(上)
  • 승인 2004.04.1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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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녀 교육 열망 안고 이민 결심

염 진 일(캐나다 토론토 경희한의원)

본지는 캐나다로 이주하려는 한의사 독자여러분에게 생동감있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지난 호까지 5회에 걸쳐서 연재한 ‘김승진 특파원 캐나다 현지 취재기’에 이어 염진일(48) 원장이 국내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기고문을 싣는다.
캐나다 이민생활에 도움될 내용들이 담겨있는 이 글은 캐나다의 이민생활, 의료제도 실태, 한의학 실태 등으로 나뉘어 3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염진일 원장은 경희대 한의대를 1983년에 졸업, 서울 강남에서 개원하다 2001년 캐나다로 이민해 토론토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편집자주)


캐나다의 생활에 많은 사람들이 동경과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게 요즘 현실이다. 한국생활 역시 쉽지만은 않고 자녀교육이라는 핑계로 무언가 삶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희망이 ‘캐나디언 드림’이니 ‘아메리칸 드림’이니 하는 추상적이고 무비판적인 동경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본인이 캐나다 이민에 대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망설이고 또 망설인 가운데 결정하게 된 동기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들이 나름대로 애니메이션에 자질이 있다는 애 엄마의 말에 처음에는 내 나름대로의 직업의 선택 내지는 가치기준에 있어서 아주 비관적이고 비판적이었기에 대화의 소재가 되지 못하도록 막았었다.

그러던 7년 전 어느 날 집사람이 아들을 유학시키자는 제안을 꺼냈다. 그 당시에도 요즘처럼 한국에서는 유학을 보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된 상황이었다.

한국의 교육제도의 문제점과 아이들이 보다 넓은 세상에서 활개치기를 바라는 부모로서의 바램때문에 결국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대다수의 한국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로서도 아들이 한의사나 의사, 변호사, 검사 등 속칭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택해 주길 내심 바랬다. 공부하는 과정은 힘들더라도 일단 마치고 나면 사회에서 대접받고 보장받는 직업들이 아닌가.

하지만 화가인 애 엄마의 눈에는 아들의 그림에 대한 소질이 남달라 보였고, 앞으로의 전망도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이라는 끈질긴 설득에 자식에 대한 나의 욕심(?)을 접게 되었다.

● ‘기러기 아빠’ 생활 청산

의사로서의 직업 또한 해보니 그리 편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고 해야 할 과정이 너무 힘들며 병원에 갇혀 환자들만을 상대해야 한다는 배부른 푸념(?)도 갖고 있던 터였다.

일단 애니메이션이나 일러스트에 있어서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Shridan College’를 보내기 위해 캐나다 토론토를 선택하였다. 부모 욕심만으로 뚜렷한 목표설정 없이 그저 유학을 보낼 경우 거의 대다수가 실패한다는 생각에 일단 아들 자신이 나름대로 철저한 정신무장과 목표의식을 갖도록 강하게 키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중2의 어린 나이에 혼자 비행기를 태워 토론토로 떠나 보내게 되었다.

시련과 고통을 맛보지 않고서는 결코 성공하기 어렵다는 내 나름대로의 억지스러운 고집 때문이었다.

유학생활 중에 잘못된 길로 빠져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게밖에 되지 않을 위인이라면 아무리 부모가 이끌어 주어도 세상에 바로 설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짐했다.

물론 지난 세월에 대해 이곳으로 이주한 후 아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듣고 보니 너무도 아찔한 도박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하는 애들에게는 반드시 부모가 곁에 있어야 하며 특히 아빠가 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유학을 오게 된 목적이 무엇인가’가 아들 자신을 지켜 주었고 결국은 300대1이라는 경쟁을 뚫고 목표로 했던 대학에 무사히 진학하여 지금은 자신감을 가지고 아주 열심히 다니고 있다.

이민을 택한 결정적인 계기는 두 딸들의 유학이었다. 여자 애들이어서 아들처럼 하기에는 나로서도 겁이 났다. 엄마를 따라 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세 명의 유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이중생활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한국에서 내가 누리던 여러 가지의 좋은 조건을 포기하기로 하고 일단 이민으로의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민생활에 대한 어려움과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약해 보이면 가족이 흔들릴 것 같아 억지로 자신감을 보였다. 만의 하나 정 이민생활이 힘이 든다면 그때 가서 나만이라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배수진이 다소간의 위안이 되었다.

● 하다 안되면 귀국 배수진

2년간의 갓 이민생활에서 나로서 느낀 점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한국에서는 복잡하고 정신 없이 생활했던 탓에 가족들과 소원했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은 두 딸도 이곳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하고 있고 나름대로의 목표의식 아래 학교에서도 인정받는 학생으로 공부하고 성장해 나가는 것을 볼 때 자식교육에서만큼은 일단 성공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나로서도 한국에서의 나의 위치인 한의사로서의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편하고 좋은 조건을 누릴 수 있는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수 없이 하였다.

지금도 자주 그런 생각에 마음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속칭 ‘기러기 아빠’가 되면 어떤가 하지만 그것마저 일단은 접어 버리기로 하였다. 앞으로 6년 정도면 3남매 모두 나름대로 성인으로 성장하고 제 갈 길을 가기 위해 바쁠텐데 그 때까지 만이라도 가족의 소중함을 서로 느끼고 살고 싶었다.

생각한 바대로 캐나다의 이민생활은 역시 쉽지 않았다. 첫째가 능통하지 못한 언어의 장벽과 많지 않은 한국민을 상대로 개업하는 것이다. 내가 한의사이기에 직업의 선택은 그 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업한 후에도 지금까지 수십 차례 이곳을 폐업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단지 억지로 꾹 참고 또 참고 있는 것뿐이다. 부족한 돈은 한국에서 가져다 쓰면 된다. 돈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문제는 없지만 자꾸만 나 자신이 무력해져 가는 모습이 싫은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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