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8·끝)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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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8·끝) - 윤창열
  • 승인 2004.10.0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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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관오리 和신(화신)의 私邸 恭王府 □

03년 8월 12일. 6박 7일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런데 비행기 출발시간이 오후 1시 10분이어서 우리는 하나의 景點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아침을 먹고 곧장 恭王府로 향했다.
恭王府는 西城區의 後海와 柳蔭街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1776~ 1785년 사이에 건립되었는데 원래는 淸代 乾隆帝의 寵臣 滿州族 大學士 和신(1750~1799)의 私宅이었다.

淸나라 嘉靖 4年(1799) 화신은 貪汚罪로 체포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 집도 몰수되었다. 뒤에 嘉慶帝는 이 저택을 그의 동생 慶王 永璘에게 주었고 咸豊帝는 다시 이 집을 그의 6번째 동생 恭親王 奕흔(혁흔)에게 주어서 비로소 恭王府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 저택은 북경에서 현존하는 가장 크고 호화로운 四合院式 淸代官邸로 근자에는 서향전이 이곳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우리는 恭王府 근처에서 내려 자전거 뒤에 의자를 설치한 인력거를 타고 북경의 골목(胡同이라고 부른다)투어를 먼저 하고 나서 공왕부 관람을 시작했다.
입구에는 마지막 황제 부의의 동생인 부걸(溥杰)이 쓴 恭王府花園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전면에 5m 정도 높이의 秀麗한 太湖石이 우뚝 서 있는데 獨樂峯, 또는 母子石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和신은 비록 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렸지만 자식이 없어서 엄마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을 이곳에 만들어 놓았으며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고 그 후 건륭제의 딸과 결혼을 시켰다 한다.
仁宗이 1895년 즉위한 후에 太上皇인 高宗 乾隆帝가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은인자중하다가 고종이 卒한 뒤에 20여조의 죄상을 선포하고 체포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공주가 탄원을 하자 仁宗은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자살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돌면 流杯亭이 있는데 바닥에 남북으로 보면 壽字로 보이고 동서로 보면 水字로 보이는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竹子院과 荷花院을 지나면 大戱樓가 나온다. 이곳은 화신이 경극을 보던 곳이다. 청나라 때 경극을 보던 유명한 건물로는 四大戱樓가 있었는데 자금성의 창음각(暢音閣), 이화원내 德和園의 大戱樓, 그리고 圓明園과 열하행궁의 청음각(淸音閣) 등으로 이 大戱樓는 이화원의 大戱樓를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꼭대기에는 스피커의 작용을 하게 하기 위해서 독을 놓아두었다 한다.

앞에는 假山이 있고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통로가 있는데 이를 秘雲洞이라고 한다. 假山의 속으로 들어가니 컴컴한 굴속에 福字가 쓰여져 있었다.
中國에서 福字는 거꾸로 놓는 것이 風俗인데 이 글은 강희황제가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쓴 글자로 황제의 御印이 있어서 거꾸로 놓지를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和신이 몰래 빼돌려서 가지고 와서 이곳을 장식한 것으로 얼핏 보면 多田으로 보인다. 이 글씨는 珍貴하게 여겨 여러 사람이 탐을 내는데 일본의 하시모토 수상도 이곳에 왔다가 이 글자를 모사하여 갔다고 한다.

화신의 권력과 축재는 상상을 초월하여 20여년간 권력을 쥐고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음을 당했으며 그가 축재한 재산은 10억여만 냥(혹자는 100억 7천만 냥이라 함)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청조 국가 재정의 10년분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秘雲洞을 통과하여 다시 獨樂峯으로 나오니 앞의 연못을 박쥐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복池(박쥐 못)라 이름 하였다. 우리는 박쥐의 모양에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中國 사람들은 福(복 복)과 복(박쥐 복)의 音이 같아서 박쥐를 吉祥의 의미로 취하고 있다.

여기서 관람을 마치고 정문으로 나와 우리일행은 부걸이 恭王府花園이라고 쓴 현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이번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이번의 4차 여행도 역시 필자에게는 잊지 못할 뜻 깊은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준비를 제대로 하여 다시 한번 여행했던 곳을 가보고 싶다. 첫 번째 갔을 때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흐릿하지만 두 번째 갔을 때는 선명하게 머리 속에 기억이 남는다.

내년 여름(2004년)의 5차 여행은 섬서성과 감숙성으로 西安과 주변의 진시황병마용, 화청지, 진시황릉, 황제릉, 약왕산의 손사막 유적지, 보계시의 신농씨 탄생지, 감숙성 天水市의 복희씨 탄생지, 백이 숙제가 은둔했던 首陽山, 감숙성의 省都 蘭州, 그리고 敦煌 등을 둘러볼 계획이다. <끝>

편집자주
필자는 지난 7월 중순 다섯 번째로 중국 의학·역사 유적지를 답사한 바 있으며 정리가 되는대로 본지에 계속 연재될 예정입니다. 귀중한 원고를 제공해 주신 필자와 관심있게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필 자 약 력
▲경희대 한의대 졸(한의학박사)
▲대전대 한의대 교수(1985~현)
▲중국 요령중의학원 연구교수(1993~4)
▲현 대전대 한의대 학장, 대한한의학원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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