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뇌택귀매 - 틀릴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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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뇌택귀매 - 틀릴 수 있는 용기
  • 승인 2021.06.18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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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장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옳은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렇게 배워 왔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없는 회색 영역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보편적으로 옳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삼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정직하고 솔직한 것은 보편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아기가 정말로 못생겼네요’ 라던가 ‘댁의 따님은 정말 공부를 못하는군요’ 라는 말을 했다간 그게 비록 사실이더라도 따귀나 얻어맞기 딱 좋다. 자기도 무척 가난하지만 거기에서 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를 잘 챙겨서 형편이 더 나아진 다음에 도우면 될 것을 둘 다 같이 가난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니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런 형편에서도 남을 돕다니 참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어느 쪽이 완전히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끔 주역에도 貞凶이라는 말이 나온다. 바르지만 흉하다는 것이다. 바른 것이 항상 옳고 좋은 것이면 흉할 리가 없는데 흉해진다. 또한 利에 대해서도 많이 나온다.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나, ‘이로울 것이 없다’는 말은 효사에 많이 등장한다. 바름과 이로움은 같지 않다. 곧은 것은 쭉 뻗어 있으나 방향에 따라서는 남이나 나를 찌를 수도 있는 것이고, 이로움은 옳거나 옳지 않거나 내게 올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볼 귀매괘는 无攸利에 관한 괘이다.

귀매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歸妹 征凶 无攸利

彖曰 歸妹 天地之大義也 天地不交而萬物不興 歸妹人之終始也 說以動 所歸妹也 征凶位不當也 无攸利 柔承剛也

누이동생을 시집보내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면 왜 안되는 걸까? 단전에는 천지의 큰 의리라고 했고 사람의 마침과 시작이라고까지 했는데, 이로울 것이 없다고까지 했다. 귀매괘에서는 음양응이 되는 짝이 구이와 육오 뿐이다. 그러니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이 둘일 것이다. 효사를 한번 살펴보자.

初九 歸妹以娣 跛能履 征 吉

초구는 제 짝인 구사와 음양응이 맞지 않는다. 걷는 것은 양쪽 다리의 협조가 착착 이루어져야 안정적인데, 서로 그렇지 못한 상태이니 절뚝거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다면, 즉 서로 같은 성향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손발을 맞춰 지낼 수 있다면 같이 살아도 길할 수 있다. 상전에는 歸妹以娣 以恒也 跛能履吉 相承也라 하였다. 변치 않을 수 있고 서로 받들어줄 수 있으면 어떻게 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九二 眇能視 利幽人之貞

구이는 육오와 서로 음양응을 이룬다. 귀매괘의 여섯 효사에서 상육과 함께 귀매라는 단어가 없는 효사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이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육오가 구이에게 시집을 오는 상황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전에서 말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타고 오르는’ 상황이 된다고 본다. 본래 양기는 상승해야 마땅하고 음기는 하강해야 마땅한데, 구이가 가서 육오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육오가 내려와 구이에게 오는 것이다. 다섯번째 효는 귀한 신분이고 거의 그 자리를 지키며 다른 효사들이 만나러 오는 것을 기다리는데, 귀매 괘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애꾸눈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한쪽 눈이라도 보이는 사람이라면 육오가 자기 자리를 떠나 구이에게 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이에게는 ‘숨어 지내는 사람의 바름’이 요구된다. 상전에는 利幽人之貞 未變常也라 했다.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이기에 이롭다는 것이다. 자기의 신분보다 훨씬 더 높은 신분의 아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시집을 오는 상황이라면 모종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변에 자랑할 일도 아니고, 귀한 신분의 아내를 통해 다른 목적을 이루려는 큰 야망을 품는 것도 안될 일이다.

六三 歸妹以須 反歸以娣

육삼의 須를 해석하는 것을 두고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須는 ‘본래’의 뜻도 있고, 뒤의 문장이 以娣이니 그와 반대되는 뜻일거라고 생각한다. 육삼의 짝은 상육이고 역시 음양응이 맞지 않는다. 양의 자리인 세번째 효에 음효가 자리잡고 있으니 자리도 마땅하지 못하다. 떳떳하지 못한 자리에 있으면서 떳떳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면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상전에는 歸妹以須 未當也라 하였다. 정실로 여동생을 시집보내려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귀한 여동생이겠으나, 만약 시집 보내려 하는 대상에게 이미 아내나 정혼자가 있다면 둘을 억지로 헤어지게 하고 내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자리를 탐내봤자 괴로움만 늘 뿐이다.

九四 歸妹愆期 遲歸有時

구사는 초구의 짝이나 음양응이 맞지 않고, 육삼과 육오 사이에 있는 양효이기도 하다. 보통 그렇게 되면 주변에 있는 음효들과 짝을 이루기도 하나 구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마도 외괘에서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오빠를 나타내는 효가 구사인 것 같다. 괘사에서 서둘러 적극적으로 하면 흉하다는 말을 한 것도 있고, 여동생들에게 걸맞는 짝이 제대로 있지 않은 것도 문제인 상황이다. 상전에는 愆期之志 有待而行也라 했다. 때를 기다려 행하는데 뜻이 있다는 것이다. 혼기는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적정 연령이다. 그러나 그 연령을 벗어났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인연이 되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연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이 마음대로 정해둔 시기를 맞추겠다고 맞지도 않은 사람과 혼인을 하면 결과가 나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구사의 때를 살피고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六五 帝乙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月幾望 吉

육오는 앞서 본대로 구이의 짝이며, 귀매 괘에서 유일하게 음양응을 이루는 짝이다. 제을의 누이동생이니 귀한 신분이나 짝이 되는 구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부군의 옷소매가 첩의 옷소매와 같이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달이 거의 찼다는 것은 구이가 큰 성과를 목전에 두고 있음을 뜻하는 것 같다. 상전에는 其位在中以貴行也라 했다. 가운데 거하고 귀함으로써 행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옷소매가 같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누이동생은 귀한 신분으로 외괘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으나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남자의 측실로 시집을 간다. 그렇다면 예상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누이동생 자신에게 매우 큰 흠이 있거나, 둘째는 짝이 되는 남자가 신분과는 상관없이 어마어마한 인재이거나. 그리고 육오의 상황은 아마도 두번째인 것 같다. 달이 거의 찼으면 길하다고 하는 것은 현재 상황에는 신분의 차이가 있으나 머지 않아 그런 것은 상관이 없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上六 女承筐无實 士刲羊无血 无攸利

상육은 육삼의 짝이며 음양응이 맞지 않는다. 여자끼리 합방을 한들 자식이 생길 리가 없듯이, 음효끼리 짝을 지어서는 생장을 할 수가 없다. 귀매괘는 분명 양효가 셋, 음효가 셋인데 그중 짝을 이루는 것은 한 쌍 뿐이다. 그나마도 올바르다고 보는 결합이 아니다. 그러니 더 나아질 것도 성장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귀매괘는 닫힌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나마 눈을 낮추어 첩의 자리라도 좋은 남자를 찾아 간 육오나, 절뚝거리지만 그래도 맞춰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초구나 구사는 나은 형편이라 해야 한다. 있는 자리에서 어쩔 수 없는 좌절을 겪어야 하는 육삼도, 나아질 희망조차 없는 상육도 있다. 요즘 20대들은 쉬운 것만 하려고 한다는 말을 윗세대들은 참 쉽게 한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노력해보지도 않고 조금 지나면 제풀에 그냥 지쳐 나가떨어져버리는 젊은이가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그들이 노력 끝에 성과를 얻은 경험이 매우 적다는 사실은 생각해주지 않는다. 성공하라고 잘되라고 채근하기만 했지, 실패하고 틀리고 잘못됐을 때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준 어른은 없었다. 그래서 요즘 20대는 ‘가성비’와 ‘소확행’의 세대가 되었다. 작은 재물이나 노력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 작지만 실패 없이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 이것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 윗세대가 끊임없이 주입한 ‘실패하면 안 된다’의 결과라고는 왜 생각하지 않을까. 귀한 내 자식 실패 없이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었던 것은 좌절과 절망을 수도 없이 겪었던 윗세대의 당연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바람은 아랫세대들에게 또 다른 좌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많은 사회 초년생들이 ‘내가 겨우 이런 것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 쌓았나 하며 괴로워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보는 눈은 높여놓고, 없는 자를 무시하며, 직업에 귀천을 두고, 사치스럽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처럼 가르쳐놓고 이제 와서 ‘눈높이를 낮추라’, ‘일손이 딸려서 외국인 노동자를 쓰는 판에’라는 말을 쉽게 내뱉는 것은 윗세대의 오만에 다름 아니다. 코인 광풍에 휘말려 아우성을 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기사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도박판에 기대를 걸다니 망해도 싸다’는 말들을 했었다. 첩으로 시집가는 일이 떳떳하지 않은 것처럼 코인은 투자를 빙자한 도박인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첩으로라도 시집가고 싶은 그 마음들은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까. 정실로 시집가고 싶은 욕심을 고집하다가 첩도 못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은 왜 헤아려주지 않을까. 코인판을 살려내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어리광인 것도 맞지만, 나는 그 너머에 짙게 깔린 좌절이 앞으로의 사회를 어디로 이끌게 될지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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