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 하기](21) 당신이 찾는 삼강오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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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 하기](21) 당신이 찾는 삼강오륜
  • 승인 2024.04.12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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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흔한 동네 점방 전경. 평상은 마을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사회적 장소다.

두어 해 전, 모 농촌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농촌 구멍가게들에 대한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인류학에서는 통계나 실험 결과 등이 아니라, 참여관찰이나 심층면접 같은 방법으로 내부자적 관점과 주관적 경험, 감정 등을 이해하는 질적 연구를 한다. 그렇다보니, 연구를 한답시고 허구헌날 각 마을의 점방에 앉아 막걸리나 맥주를 마시면서 누가 오고 가며 무슨 대화를 하고 뭘 먹는지 등을 살펴보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대개 점방에 찾아와 사장이 차려주는 조촐한 안주상에 소주를 마시며 수다 떠는 이들은 중노년의 남자들이다. 나는 어떻게든 옆에 앉아 대화에 끼어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투명인간 취급을 하거나 노골적으로 귀찮아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자 다니다가 대리기사로 남편을 동행하게 되면서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간 나를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던 아저씨, 할아버지들이 남편에게는 먼저 말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는 한 60대 남자가 남편에게, ‘어느 마을에 살며, 어느 회사를 다니고, 언제 귀촌했는지’ 등등을 한참이나 물었다. 잘됐다 싶어 그에게 “이 마을 사세요?”라고 되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가게가 떠나가도록 쩌렁쩌렁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이도 어린 여자가 무려 질문을 했다는 거였다. 뭐라는 거야. 단전에서 올라오는 깊은 빡침에 그에게 따져 물었다. “어르신은 저희한테 이것저것 다 물어보셨잖아요.” 그는 조금도 머뭇대는 기색 없이 버럭버럭 핏대를 올리며 아주 인상적인 답을 남겼다. “21세기에는 삼강오륜도 없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어디서 먼저 질문을 하는 거야?” 그의 반문은 왜 그동안 내가 시골 점방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받았는지를 알려주는 실마리였고, 농촌에서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어떤 사회적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유용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1)

물론 시골이라서, 농촌이라서, 여성들이 모든 공간과 상황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추상적인 선에서 사회가 합의했던 여러 가치들조차 구체적 일상에서는 종종 균열되고 마는데, 3-40대의 여성은 그런 상황을 좀 더 자주 마주칠 뿐이다. 다른 예로, 아이 초등학교에서의 사례도 있다. 학교 운영위원을 지난 2년간 했었는데, 처음 운영위원회 회의 때 교장실 소파에 앉아있던 내게 행정실장과 교장 선생님께서 인사로 건넸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학교 운영위원회에 여자분이 들어오신 건 학교 역사상 처음입니다. 하하하!” 황당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그럼 그동안 엄마들은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없나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어머니들은 ‘자모회’에 참여하셨죠. 하하하!” 자모회라니. 8-90년대에 국민학교 졸업한 사람들이나 들어봤을 법한 촌스러운 이름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식명칭은 ‘학부모회’이고, 학교 예결산 등을 심의하는 운영위원회와는 달리 체육대회나 수학여행 등 공식 행사에 주로 간식, 선물 지원 등을 도맡아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학교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에는 아빠들이, 행사나 각종 지원을 전담하는 역할은 엄마들이 하는 식의 암묵적이고 명확한 성별 분업이 이루어져 왔었는데, 하필 눈치 없는 내가 운영위원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운영위원이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장 처음 맞닥뜨린 난관은 신청서 작성이었다. 독특하게도 당시 신청서 항목에는 호주 기입란이 있었다. 가족 중 남자만이 호주가 될 수 있다는, 여자는 아버지, 남편, 그도 아니면 남동생이나 아들을 호주로 삼아야만 가족구성원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바로 그 호주를 기입해야 했다. 2008년에 폐지된 호주제가, 초등학교 운영위원 좀 해보겠다는 2022년의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나의 호주가 누구인지를 고민해야 했는데, 결혼한 여자의 호주는 친정아버지인지 남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물어봐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라 전혀 모르겠다’는 답뿐이었다. 결국 그 빈칸에 세 개의 물음표와 함께 ‘호주제 2008년 폐지’라고 적어냈고, 운영위원이 된 후 처음 참석한 회의에서 대체 호주를 왜 쓰라고 하는지 공개적으로 물었다. 황당하게도, 그 자리에 앉아있었던 그 누구도 신청서에 호주 기입란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들 본인이 본인 가족의 호주이다 보니 전혀 관심조차 갖질 못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그 문제의 신청서 양식은 영원히 아이 초등학교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아무도 관심은 없겠지만, 2년간 운영위원 재임 기간 중 가장 내세울 만한 업적으로 그것을 꼽고 싶다.

여전히 난처한 상황은 도처에 깔려있고, 농촌에서의 성차별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경험이다. 예전에는 눈치 없이 아무데나 말을 붙이고 끼워달라고 했었지만, 요즘은 어떻게 하면 적당히 조신한 애기엄마인 것처럼 굴 수 있는지 종종 고민하곤 한다. 너무 남의 눈에 튀어 보이는 게 오히려 내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걸 깨달아서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농촌에서 성별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모든 일들이 다 비합리적인 성차별 때문인 것은 아니다. 다음에는 우리 마을 페미니스트들의 어떤 주장과 그 오류에 대해 써볼 계획이다.

 

신유정 / 한의사, 인류학 박사

 

각주

1) 이 일화는 대산농촌재단 농업연구총서 11집 <기후위기 시대, 농업과 농촌의 미래(2023)>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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