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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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4)
  • 승인 2005.08.2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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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 중국 국가 영도자들이 제사 올리는 헌원묘 ■

황제릉의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헌원묘(軒轅廟)로 갔다. 헌원묘는 일명 황제묘(黃帝廟)라고도 부르는데 황제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중국 사람들은 황제릉이 풍수학적으로 용봉정상(龍鳳呈祥; 용과 봉황이 어울려 상서로움을 나타내다)의 대 길지라고 자랑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당도 자좌오향(子坐午向; 북쪽에 자리를 잡고 남쪽을 바라봄)의 명당으로 “뒤로는 교산의 용호의 땅을 등지고 앞으로는 저수의 봉황의 못을 바라보는(背依橋山龍虎地 門迎沮水鳳凰池)” 좋은 형국이라고 하였다.

처음 창건된 것은 한나라 때이고 송태조 개보(開보) 5년(972년)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우리가 먼저 들린 곳은 진열실이었다. 진열실 안에는

중화개국오천년(中華開國五千年): 중화민족이 나라를 연 것이 5천년이 되었으니
신주헌원자고전(神州軒轅自古傳): 중국 땅에서는 시조가 황제라고 예로부터 전해오네
창조지남거(創造指南車): 지남차를 만들었고
평정치우란(平定蚩尤亂): 치우의 난리를 평정했네
세계문명(世界文明): 세계의 문명이
유유아선(唯有我先): 오직 우리가 가장 앞선다네.

라고 쓴 손문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 글은 손문이 1912년 황제릉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쓴 것이라고 하는데 5천년의 역사를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자부심이 부럽기도 했다.

황제가 치우의 난리를 평정했다고 하는 것은 <사기>의 황제본기에 나오는 말인데 우리의 <환단고기>를 보면 오히려 우리 배달국의 14대 천황인 자오지환웅(즉, 치우천황)이 황제를 격파하고 그를 제후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주관과 객관에 따라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니만치 이제 우리도 주체성을 가지고 중국의 기록이라고 모두 맹신하는 사대의 습성을 버려야 할 것이다.

사당의 문을 걸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서있는 5천년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측백나무를 마주하게 되는데 황제가 손수 심었다고 전해지며 군백지관(群栢之冠; 뭇 측백나무의 으뜸)이라고 하는 헌원백(軒轅柏)이 있다.
이 나무의 북쪽에는 과보추일석(과父追日石)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평범한 돌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은데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돌의 무늬가 마치 한사람이 머리를 산발을 하고 태양을 잡으려고 쫓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산해경>에 나오는데 전설에 의하면 과보는 키가 산처럼 크고 힘이 대단히 세었다고 한다. 그의 귀걸이는 두 마리의 노란 뱀으로 만든 것이고 손에도 두 마리의 노란 뱀을 가지고 있다. 그는 환상(幻想)이 풍부하고 광명(光明)을 아주 사랑하여 태양을 하늘에 영원히 머물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나무 지팡이와 노란 뱀을 손에 쥐고 큰 걸음으로 태양을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강과 산을 건너 목이 마르고 지치자 그는 마침내 땅에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몸은 하나의 산이 되었는데 이것이 과보산(과父山)으로 지금 하남성 영보현(靈보縣)의 동남쪽에 있다고 한다. 이 돌은 사람들이 자연을 정복한 굳센 의지와 빛 즉 문명을 추구하는 위대한 정신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관람하고 사당으로 가려면 성심정(誠心亭)을 통과해야 한다. 이곳은 역대의 관원들이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기 전에 의관을 정제하고 제수를 보관하던 곳이라 한다.
다음으로 비정(碑亭)을 지나는데 중국의 근대사에 대단히 큰 영향을 남긴 손중산, 장개석, 모택동, 등소평이 쓴 4개의 비석이 서 있다. 비정을 지나면 왼쪽에 황제의 각인(脚印)이 있다.
이 발자국은 황릉현성 동남쪽의 주가와촌(周家와村)에서 출토되었는데 한나라 때의 문물이라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제의 네 번째 왕비 막모(막母)가 신발을 발명했다고 하는데 이때의 상황에 의거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거대한 측백나무가 있는데 괘갑백(괘甲柏) 또는 장군수(將軍樹)라고 부르는 나무다. 이 나무는 한무제가 원봉(元封) 원년(B.C. 110년) 흉노를 정벌하고 오다가 황제에게 제사를 지낼 때 몸에 입었던 갑옷과 투구를 벗어서 걸어 놓았던 것에서 이러한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우측에는 이붕과 강택민이 쓴 비석이 있는데 강택민은 중화문명 원원유장(中華文明 源遠流長; 중국의 문명은 근원도 오래되었고 흐름도 장구하다)이라 쓰고 있다.

이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인문초조(人文初祖)라고 쓴 현판을 달아 놓은 대전(大殿)이 나오는데 바로 헌원묘의 정전이다. 정전(正殿) 안에는 “헌원황제지위(軒轅黃帝之位)”라고 쓴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는데 1987년 홍콩사람 담조림(湛兆霖), 정만기(程萬琦)등이 8만원의 돈을 희사하여 산동성 무량사당(武梁祠堂)에 있는 한나라 때의 석상을 바탕으로 하여 황제의 석조상을 복제해 놓았다. 석상의 우측과 좌측의 기둥에는 조공택백대 종덕윤천추(祖功澤百代 宗德潤千秋; 시조의 공훈은 백대에 은혜를 끼쳤고 으뜸 되는 은덕은 천추를 적시다)라고 되어있다.

사기를 보면 황제의 정비는 누조(누祖)라고 하는데 그녀는 누에를 쳐서 실을 뽑아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을 가르쳐 누에의 신으로 받들어 지고 있다. 황제는 모두 2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중 정비인 누조와의 사이에서는 현효(玄효)와 창의(昌意) 등 두 아들을 두었고 25명의 아들 중 성(姓)을 얻어 자립한 아들은 14명이었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요(堯)와 하, 은, 주 삼대의 시조가 모두 황제의 혈통이라 하여 황제를 중국민족의 시조로 받들고 있고 사마천의 사기도 황제로부터 시작을 하고 있다.

헌원묘의 근처에는 2개의 궐문(闕門)을 비롯하여 규모가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지어 놓았는데 금년(2004년) 4월에 있었던 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금년에는 특별히 중앙정부의 영도자들이 참가하여 성대하게 황제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전세계로 현장에서 중계까지 하였다고 한다.
문득 우리의 국조이신 단군이 뇌리에 스친다.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이고 유물론자들이지만 이념을 초월해서 자기네 시조를 이렇게 끔찍이 받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알고 있는가.

너무도 짧은 시간에 5000년 전의 역사의 현장을 가슴에 담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나의 시야와 안목을 열어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앎의 귀착지인 깨달음이란 이처럼 봄을 통해서 생각을 통해서 열리는 것인가?
황릉현에서의 황제릉과 헌원묘의 관람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오늘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탐방지인 요현의 약왕산으로 이동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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