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7)
상태바
[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7)
  • 승인 2005.09.16 1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 천금익방을 쓴 남암(南庵) □

■ 아시혈(阿是穴)의 창시자 손사막

‘千金方’<사진>은 의학백과 사전의 성격을 가진 책으로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 태의정성(大醫精誠) 등을 통해 의사의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부인과와 소아과를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30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卷)1 총론에 이어 권2~4까지 부인과 병을, 권5는 소아과 병을 기술하여 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장부로써 질병을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는 구급(救急), 음식치료, 양생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 등이다.

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시혈(阿是穴)도 손사막이 처음으로 명명했다는 것이다. 사천성에 다리가 아픈 병을 앓고 있는 늙은 사냥꾼이 있었다는데 통증이 발작을 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백방으로 의사를 구해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손사막을 찾아왔다. 손사막은 사냥꾼의 병을 치료하려고 10여일 동안 침과 약을 다 써 보았지만 치료효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침구에서 쓰는 경혈은 모두 14경에서 벗어나지를 않는데 이외에 다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경혈이 있는가?” 그는 사냥꾼의 다리를 이리저리 누르다가 다리의 아픈 곳을 누르자 사냥꾼은 갑자기 큰 소리로 “아(아)! 맞습니다(是)”라고 소리를 질렀다. 손사막은 이 통점(痛點)을 꼭 누르면서 이곳에 침을 놓고 뜸을 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사냥꾼의 다리 통증은 많이 완화되었고 그는 천천히 잠이 들었다. 마침내 사냥꾼의 병은 다 나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손사막은 이러한 압통점이 있는 혈위(穴位)를 아시혈이라고 명명하였다.

■ 장중경(張仲景) 이후 제1인자 손사막

손사막이 지은 저서는 70여종 이상이 알려져 있지만 거의 모두 산실되어 천금요방과 천금익방만이 널리 전해지고 있다. 근대의 중국의 저명한 중의학자 황죽재(黃竹齋)는 손사막을 평하기를 “공부한 것이 넓고, 크고, 정밀하고 미묘한 데까지 들어갔으며 도와 덕을 겸비하여 위대한 한 시대의 으뜸가는 스승이 되었으니 중경이후로는 제 일인자라 할 것이다(博大精微하고 道全德備하야 蔚然爲一代宗師하니 蓋仲景后一人也라)라고 하였다.
말년에 그는 고대하던 상한론을 얻어서 읽을 수 있었고 천금익방을 지은 후 682년 1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신농씨의 고향 보계시 □

7월 14일 아침, 호텔을 출발하여 우리는 먼저 옛날 장안성의 서문이었던 실크로드의 기점(The Starting Point of Silk Road)으로 향했다. 옛날의 장안성은 지금 서안성의 9.5배가 될 정도로 컸으며 성을 쌓을 때 외면만 벽돌로 쌓고 내면은 황토를 위주로 찹쌀죽, 키위즙, 석회, 소금 등을 접착제로 넣어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낙타와 대상 조형물을 차로 한 바퀴 돌아보고는 곧바로 서안에서 서쪽으로 170㎞ 떨어져 있는 寶鷄市로 향했다.

■ 보계 지명의 유래

보계(寶鷄)는 보배스런 닭이란 뜻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신비스런 유래가 있다. 진(秦)의 14대 임금 목공(穆公)이 주위의 나라가 크게 귀순해 온 것을 기념해 큰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끝나고 진목공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한 부인을 따라 천상의 궁궐에 올라가 상제(上帝)를 배알하였다. 상제는 그에게 “임호(任好 ; 진목공의 이름)야, 너는 진(晋)나라의 소란을 평정할 지어다”라는 명을 거듭해서 내렸다. 그 후 진목공은 다시 그 부인을 따라 궁궐 밖으로 나왔다.

진목공은 그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다. 부인이 대답하기를 “첩은 보부인(寶夫人)이라 하오. 태백산(太白山) 서쪽 기슭에 있으니 바로 임금의 나라 안에 있습니다. 첩의 남편인 섭군(葉君)은 남양(南陽)땅에서 별거하고 있는데 1년 혹은 2년마다 한 번씩 와서 첩을 만납니다. 임금께서 첩을 위해 사당을 지어 준다면 첩은 임금으로 하여금 패업(覇業)을 성취시켜 만세에 이름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진목공은 내사(內史) 요(廖)에게 보부인에 대해서 물었다. 내사요는 6대 문공(文公) 19년(B.C. 747년)때에 있었던 다음의 이야기를 목공에게 아뢰었다.

“옛날 진창(陳倉, 보계의 옛이름) 사람이 땅속에서 이상한 짐승을 잡아서 선군께 바치려고 가던 도중에 두 동자를 만났답니다. 두 동자는 끌려가는 짐승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은 사람을 학대하더니 이제 산 사람에게 잡혔구나’ 하였답니다. 진창 사람이 그 뜻을 묻자 ‘저 짐승은 위(위)라는 동물인데 시체의 뇌수(腦髓)만 파먹고 살기 때문에 그 정기(精氣)를 얻어 능히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자 그 위란 짐승이 사람말로 ‘저 두 동자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는 암놈이고 하나는 수놈인데 이름은 진보(陳寶)로 꿩의 정(精)입니다. 수놈을 얻은 자는 왕이 되고 암놈을 얻은 자는 패주(覇主)가 됩니다(得雄者는 王이요, 得雌者는 覇라)’. 이 말을 듣고 진창 사람이 위를 버리고 두 동자를 잡으려고 쫓아가자 두 동자는 꿩으로 변해 날아갔습니다. 진창 사람이 이 사실을 선군께 고하고 선군께서 ‘이 사실을 기록해 두라’ 명하셨고 지금도 내부(內府)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진목공은 선군의 남긴 기록을 읽어보고는 다음날 태백산으로 사냥을 떠났다. 태백산의 줄기를 타고 서쪽으로 가 거의 진창산(陳倉山)에 이르렀을 때 꿩 한 마리를 그물로 잡았다. 그 꿩은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사람에게 잡히자 곧 돌로 변해버렸다. 내사요가 이것이 바로 보부인이라 하면서 “암놈을 얻으면 제후의 패자가 된다하였으니 어찌 길한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진목공은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돌꿩을 안치하여 보부인사(寶夫人祠)라 하고 진창산을 보계산이라 하였다. 그 뒤 1년 혹은 2년마다 산위에서 붉은 광명이 십 여길씩 솟고 우레 소리가 은은히 일어났는데 이는 보부인의 남편인 섭군(葉君)이 찾아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뒤 한나라의 광무제가 남양땅에서 일어나 다시 후한을 건국하였는데 세상에서 말하기를 수꿩을 얻은 자가 왕이 된다(得雄者王)는 말이 헛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나라 숙종 지덕(至德) 2년(757년) 진창산에서 다시 신조(神鳥)가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10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숙종이 이것을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생각하고 진창(陳倉)이라는 이름을 보계(寶鷄)로 고쳐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