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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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9)
  • 승인 2005.12.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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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주의 유래와 개황

가이드는 차 속에서 난주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해 주었다.
난주(蘭州)가 중국과 관련을 갖게 된 것은 B.C. 215년 진시황이 몽념(蒙恬)을 파견하여 진나라의 영토로 만들고 농서군(농西郡)의 지역으로 편입한 것이라 한다. 한무제 원수(元狩) 2년(B.C. 121년) 곽거병(곽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지금 난주시의 서고구(西固區) 남쪽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고 하며 일설로는 한나라 선제(宣帝) 신작(神爵) 원년(B.C. 61년) 조충국(趙充國)이 6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반란을 일으킨 강족(羌族)을 격파하고 만 여명을 항복받은 후 이곳에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아마 금성(金城)이란 명칭은 곽거병이 흉노와 하서전쟁(河西戰爭)을 한 후 돌아오면서 쌓은 금성관(金城關)에서 시작된 것 같고 조충국은 금성을 더 확대하여 쌓은 듯하다. 이것이 난주에 대한 대표명칭이 되어 700여년을 내려왔다고 한다.
난주라는 명칭을 처음 쓴 것은 수나라 개황(開皇)원년인 581년부터라고 한다. 명칭의 유래는 시의 남쪽에 고란산(皐蘭山)이 있어 난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난주는 청나라 강희(康熙) 5년(1666년)에 감숙성의 성도(省都)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난주의 지형상의 특징은 황하가 시의 중심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난주의 인구는 300여만(중심의 五區와 관할하는 楡中縣, 皐蘭縣, 永登縣 포함)이고, 연 평균 강수량은 300~400㎖ 정도며 이곳에서부터는 서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적어져서 돈황은 30~40㎖에 불과하다고 한다. 난주는 또 군사중진으로 서북 5성(省)을 관할하는 난주군구(蘭州軍區)의 소재지라고도 한다. 난주는 현재 농업도시에서 공업도시로 바뀌는 과도기에 있으며, 현재 국가 주석인 호금도(후진타오)가 이곳 난주의 저수지에서 10여년 이상 근무했다고도 한다.

난주에는 지질 연구소가 유명한데 남극(南極)연구소도 이곳에서 파견되어 나갔고, 추위를 연구하는 한구(寒區)연구소, 가뭄을 연구하는 한구(旱區)연구소도 있다고 한다. 난주에서는 과일도 많이 생산되는데 이중 백란과(白蘭瓜)가 유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에서 종자를 가져와서 만든 변종인데 이곳에서 아주 잘 자라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를 태운 차는 황토고원을 끝없이 달려 드디어 난주에 도착을 하였다. 전순루(全順樓)라는 음식점에서 난주의 풍미(風味)인 우육면(牛肉面)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음식점의 벽에 맥적산석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냥 지나친 아쉬움이 다시 살아난다.

■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저녁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가는 T657번 밤기차를 탔다. 오늘 저녁은 기차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 첫날부터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와도 이별을 했다. 기사와 가이드는 우리를 태우고 왔던 차를 타고 밤을 새워 서안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7월 16일, 난주와 신강을 연결하는 난신철로(蘭新鐵路)의 기차위에서 아침에 눈을 떠보니 왼쪽에는 기련산맥(祁連山脈)이 끝없이 이어지고 오른쪽에는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기련산맥의 꼭대기에는 7월 복중인데도 흰 눈이 덮여있었다.

청수(淸水)역을 지나니 물도 조금씩 보이고 좌우에는 곡식과 채소들도 무성히 자라고 나무들도 우뚝우뚝 서 있으며 양떼도 보인다. 우리는 밤새 무위시(武威市), 금창시(金昌市), 장액시(張掖市)를 지나 주천시(酒泉市)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무위는 양주(凉州), 장액은 감주(甘州), 주천은 숙주(肅州)로 불리었는데 여기에서 감숙성이란 명칭이 유래한 것이다.

무위는 B.C. 121년 곽기병이 하서에 출정하여 흉노에 대승을 거두어 무공(武功)과 군위(軍威)를 드러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러한 이름을 지었다하며 달리는 말이 나는 제비를 밟고 있는 동분마(銅奔馬)가 출토된 뇌대한묘(雷台漢墓)가 유명하다. 한의학적으로는 1972년 11월 무위의 한탄파(旱灘坡)에 있는 한나라 시대의 무덤에서 발견한 의방을 기재한 간독이 유명하다. 이를 치백병방(治百病方)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30여개 의방이 기재되어 있다. 처방의 내용은 내경 이전에 나온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보다는 더욱 명확하고 구체적이지만 상한잡병론보다는 소박하여 오십이병방에서 상한잡병론에 이르는 과도기적인 내용으로 서한시대 임상의학의 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장액은 흉노의 오른팔을 잘라 중국의 겨드랑이를 펼친다(斷匈奴之右臂하야 張中國之臂掖也라)는 뜻에서 명칭이 유래하였으며 무위와 함께 실크로드의 중진(重鎭)으로 예로부터 금장액(金張掖) 은무위(銀武威)라는 예칭이 있었다고 한다.
주천의 지명유래도 곽거병과 관련이 있다. 곽거병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에 군사를 이곳에 주둔시켰다한다. 한무제는 어주(御酒) 한 단지를 하사하였는데 사람은 많고 술은 적어 곽거병은 이 술을 금천(金泉)속에 쏟아 부은 후 군사들과 함께 마셨는데 이후 주천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를 태운 기차는 주천에서 정차를 하였다가 가욕관을 향해 출발하였다. 주천을 지나니 무덤도 보이고 무덤 앞의 비석도 보인다. 주천에서 가욕관까지는 21㎞로 멀지 않는 거리이다. 8시 25분, 가욕관에 도착하니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우리들이 밤새 달려온 길을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르는데 기련산맥과 곤륜산맥의 사이에 있는 복도처럼 생긴 회랑(回廊)으로 넓은 곳은 270㎞에 이르고 좁은 곳은 60㎞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의 온도는 43도까지 올라간다고 하고, 이곳의 연 강수량은 50㎖도 안되 물은 이곳에서 120㎞ 떨어져 있는 쌍탑저수지에서 끌어다 쓴다고 하며 음용수도 2시간만 공급하고 농사짓는 물도 돈을 낸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사막의 척박함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그래서 사막의 배라고 하는 낙타가 아주 중요한 가축인데 낙타는 한번에 100㎏의 물을 마시고 200㎏의 짐을 지고 다니는데 3개월을 물을 안 마셔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는 천강대주점(川江大酒店)이라는 곳에서 뷔페식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현벽장성(懸壁長城)을 보기 위해 출발했다.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대한한의학원전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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