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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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6)
  • 승인 2006.02.2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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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의 채색불, 보살상이 뛰어난 328굴 □

우리들을 제일 먼저 안내한 곳은 328굴이다. 이 굴은 당나라 초기에 조성되었는데 정면에는 석가모니불이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고 좌우(마주보면서)에는 제자 아난과 가섭이 서 있으며 좌우에 보살이 앉아 있고 다시 4위(位)의 공양(供養)보살이 호궤(胡궤)하고 있다. <사진 上 참조>
호궤란 한 다리는 무릎을 굽혀 땅에 대고 다른 한 다리는 무릎을 굽혀 세우고 있는 모습으로 원래 호인(胡人)들이 무릎 꿇고 절하는 예식이었는데 뒤에 보살의 조상(造像)형식이 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현재 왼쪽의 공양보살은 사라지고 없는데 1924년 미국인 ‘워너’가 훔쳐가 지금은 보스톤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워너는 막고굴의 매개동굴을 살펴보면서 아름답게 채색된 벽화 앞에서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끈끈한 접착제를 바른 천을 씌웠다가 접착면이 굳은 후 떼어내는 방법으로 26폭의 벽화와 바로 328굴의 보살을 훔쳐갔던 것이다.

현존하는 8구의 불보살상과 천장, 벽 등은 모두 화려하게 채색된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1300여년 전의 빛바래지 않은 모습을 상상해 보건대 환상적이었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이곳의 석가모니 불은 막고굴에서 가장 온전하고 아름다운 불상이라하며 가섭의 후중하고 완숙한 모습과 아난의 영준(英俊)하고 총명한 모습, 양위(兩位) 보살의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 등은 모두 당대 채색불 보살상의 걸작품이었다. 벽화는 오대와 송을 거치면서 다시 그린 그림이라 한다.

□ 洪辨이 판 16굴과 洪辨의 影窟 17굴 □

다음으로 우리가 간 곳은 16굴과 17굴이다. 16굴은 만당(晩唐)시기에 판 대형의 동굴로 오화상굴(吳和尙窟) 또는 삼층루(三層褸)라고도 하는데 중앙에 불단(佛壇)이 있고 불단 뒤에는 대형의 배병(背屛)이 굴정(窟頂)을 향해 있는 배병식(背屛式) 동굴이다.
이 굴은 당나라 말기 대중(大中) 5년부터 함통(咸通) 3년(851~862)에 이르기까지 성이 오(吳)씨인 하서 도승통(河西都僧統) 홍변(洪辨, ?~862)이 판 것으로 당시에는 규모가 대단히 컸다 한다. 지금 있는 소상은 청대의 것으로 치졸하고 벽화도 청대에 다시 그린 것으로 당대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16굴의 입구 우측(북쪽)에 있는 작은 동굴이 17굴이다. 이 굴은 홍변의 영굴(影窟) 즉 지금의 개념으로는 기념당이다. 정면에는 단정하게 앉아있는 홍변의 상이 있는데 송나라 말기에 전란으로 366굴에 옮겨가 있던 것을 1964년 다시 원래의 위치로 복귀해 놓은 것이라 한다. <사진 下 참조>
홍변은 만당시기 하서의 유명한 고승으로 그는 장의조(張議潮)가 토번을 쫓아 낼 때 참여하였고 그의 제자는 장의조의 사자를 따라 장안에 가서 승리를 보고하고 하서 11주의 도적(圖籍)을 바쳤다.

그리하여 당왕조는 홍변을 하서석문도승통(河西釋門都僧統)으로 봉하여 하서일대의 종교사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홍변상 뒤의 좌우에는 푸른 나무와 비구니 및 시녀의 상이 그려져 있는데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
특히 근시녀(近侍女)는 고승 홍변을 시중드는 속가의 사람으로 얼굴과 형체가 풍만하고, 머리는 단정하게 묶고 몸에는 당나라 때 유행하던 남자의 옷을 걸치고 오른손에는 주장자를, 왼손에는 수건을 들고 있다.

□ 5만 여점의 희귀자료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장경동 17굴 □

이 17굴이 바로 1900년 왕원록(王圓록, 1850~1931)도사가 5만 여권의 희귀한 서적들을 발견했던 장경동(藏經洞)이다. 왕원록의 원적은 호북성 마성(麻城) 사람으로 섬서에서 태어났고 주천(酒泉)에 와서 병사로 있다가 출가하여 도사(道士)가 되었다.
운유(雲遊) 하면서 1892년 쯤 막고굴에 도착하여 탁발한 온 돈으로 당지의 서투른 미장이를 불러다가 진귀한 불교벽화를 회칠해 버렸고 불상을 깨뜨려 부수고 도교의 내용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1900년 음력 5월 26일 16굴의 들어가는 길에 쌓여 있는 모래와 돌들을 제거하자 벽이 갈라지면서 하나의 구멍이 나타났는데 마치 불광(佛光)과 같았고 벽을 깨뜨리자 조그마한 굴이 있었고 이 안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고 돈황학을 성립시킨 신물(神物)들이 발견된 것이다.
장경동 앞에 있는 돈황장경동 진열관을 관람했다. 장경동은 가로, 세로 3m가 되는 정방형의 공간인데 이곳에는 359년부터 1002년까지 16국, 북위, 수, 당, 오대, 북송 때까지의 불교경전, 서적, 문서, 수 놓은 것, 그림, 불상을 그린 깃발, 직물, 탁본 등의 희귀한 자료 5만여점이 보관되어 있었다.

쓰여진 문자는 한문이외에 티베트어, 위그루어, 돌궐어, 우전문(于전文), 시리아어 등이 있었고 소량의 산스크리트어, 몽고어, 거로문(거盧文), 소구드어 등 10여 종류의 문자로 기록된 자료들도 있었다.
이곳의 전시물 중에는 뜻밖에 맹선(孟詵)이 지은 식료본초(食療本草)가 전시되고 있었다. 식료본초의 원서는 이미 망실되어 전해오지 않는데 현존하는 것은 이곳 장경동에서 나온 고초본(古抄本)의 잔권(殘卷)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맹선(621~713년)은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 사람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벼슬이 광록대부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손사막을 스승으로 섬긴 적이 있었는데 그의 학문은 식료(食療)와 양생(養生)에 크게 뛰어났다. 그는 당이전의 음식요법의 기초위에서 당시에 보익작용이 있는 약물을 수집하고 관련된 문헌을 참고하여 보양방(補養方)을 편찬하였다.
뒤에 그의 제자 장정(張鼎)이 원서의 138조에 89조를 증보하여 모두 227조를 만들어 식료본초(食療本草)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장경동에서 나온 모든 의학문헌은 80여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속>

윤창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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