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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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8)
  • 승인 2006.03.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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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천의 고향 돈황 □

막고굴은 비천(飛天)의 고향이라 하고 비천은 돈황 예술의 상징이다.
돈황지구의 500여개의 석굴가운데는 모두 대량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비천은 불교의 건달바와 긴나라의 화신이다. 건달바는 천가신(天歌神)으로 의역하고 긴나라는 천악신(天樂神)으로 의역한다.
원래 고대인도 신화 중의 오락신과 가무신으로 한 쌍의 부부이나 뒤에 불교에 흡수되어 천룡팔부신의 하나가 되었다. 건달바의 임무는 불국(佛國) 안에서 향기를 뿌리고 부처를 위해 꽃을 바치고 보배를 공양하고 꽃밭에 머물고 천궁(天宮)을 나는 것이며, 긴나라의 임무는 불국(佛國)안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지만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 뒤에 건달바와 긴나라는 서로 합쳐져서 남녀도 구분이 되지 않고 기능도 구분되지 않고 합하여 일체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것으로 변했다. 초기에 천궁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것을 “천궁기악(天宮伎樂)”이라고 했고, 뒤에 악기를 가지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비천기악(飛天伎樂)”이라고 불렀다.

돈황비천의 풍격(風格)과 특징은 날개가 길지 않고 깃털이 나지 않았고 구름의 도움은 받되 구름을 의지하지는 않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옷과 채색된 허리띠에 의지하여 허공을 난다. 모습이 다양하고 변화가 무쌍하다. 이것은 중국의 전통과 외국의 비천예술이 융합하여 돈황비천의 독특한 모습을 창조한 것이다.
북량에서 북위(366~535)에 이르는 170여년은 비천의 흥기시기(興起時期)로 비천의 모습이 소탈하고 소박하며 고졸하다. 서위에서 수나라(535~618)에 이르는 80여년은 비천의 창신(創新)시기로 비천의 모습이 다양하면서도 변화가 많다. 이시기의 비천은 불교의 천인(天人)과 도교의 우인(羽人), 서역의 비천과 중국의 비선(飛仙)이 융합된 창신(創新)의 단계로 중서(中西)가 결합된 모습이다. 초당에서 만당(618~907)까지의 약 300년간은 비천의 전성기로 자유분방한 모습을 띤다. 당나라 때 돈황의 비천은 인도와 서역풍의 모습은 적고 완전히 중국화 된 비천이다.

□ 미륵대불이 모셔져 있는 96굴 □

우리는 이밖에도 428굴, 259굴, 96굴, 172굴, 173굴, 130굴, 148굴 등을 둘러보았는데 이 중 96굴 한 곳만 소개한다.
96굴은 돈황에서 제일 큰 대불로 석태니소(石胎泥塑)의 미륵불좌상이다. 석태란 돌을 깎아서 신체의 윤곽을 만들고 니소란 진흙으로 밖에서 모양을 만들고 채색을 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측천무후 증성(證聖) 원년(695년) 영은(靈隱)선사와 음조(陰祖)거사가 만든 것이라 한다. 대불의 높이는 34.5m로 돈황석굴 중에서 가장 크며 중국에서 2번째 세계에서 4번째 대불이라 한다. 첫 번째 대불은 사천성에 있는 낙산대불로 높이가 71m이고 제2대불은 아프카니스탄 바미얀 석굴의 동대불로 45m이고 세번째가 바미얀의 서대불로 높이가 38m라 한다.

그런데 탈레반 정권에 의해 바미얀 석불이 파괴되었으니 돈황의 미륵불이 이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불상들은 모두 노천에 있지만 이 불상은 실내에 있으니 실내제일대불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상은 당나라 개원년간에 만든 130굴 대불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대불 이라고도 부른다. 후대에 여러번의 중수를 거쳤는데 현존하는 모습은 1928년에 단장하고 그림을 그린 것인데 기본적으로는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87년에 돈황 연구원 주관하에 대불의 양손을 다시 만들었다.
대불 밖의 건물은 단애에 의지하여 건축한 것이다. 원래는 4층이었으나 만당시기에 개건(改建)할 때 5층이 되었고 966년 송나라초기에 중수하였으며 현존하는 9층의 목조건물은 1935년에 지은 것으로 속칭 9층루(九層樓)라고 부르는데 막고굴의 상징성 건축표지(標志)이다.

□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삼위산 □

막고굴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막고굴의 패방을 나오니 우리들 앞에 커다란 산이 마주하는데 바로 삼위산(三危山)이다. 나는 돈황에 오기 이전부터 삼위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삼위산이 서적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서경이다. 서경의 순전(舜典)에 “삼묘를 삼위산으로 쫓아 냈다(竄三苗于三危)”라고 했고 우공(禹貢)에서 “삼위산이 이미 사람이 살 수있게 되자 삼묘가 크게 안정이 되었다(三危旣宅하니 三苗丕서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도 환인천제께서 “삼위산과 태백산(즉 백두산)을 내려다보니 홍익인간 할 만하였다(下視三危太白하니 可以弘益人間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삼위의 의미를 몰라 대부분 얼버무리고 있는 상태이다.
환단고기를 보면 우리의 환웅천황은 문명개척단 삼천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으로 진출하시고 중국의 시조 반고(盤固)는 삼위산(三危山)의 납림동굴(拉林洞窟)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의 서적을 보면 반고와 관련된 전설은 하나도 없고 무예가 출중했던 대위(大危) 이위(二危) 삼위(三危)형제가 태양과 달을 천구(天狗)로부터 빼앗아 왔고 그 후 이산의 세 봉우리가 되었다는 전설과 관세음보살 서왕모와 관련된 전설만이 전해져 오고 있다.

□ 처량만세 왕원록 □

입장권 파는 곳으로 되돌아오니 들어갈 때는 그냥 지나쳤던 왕원록 도사의 탑이 있다. 도를 닦아 신선이 되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출가를 했지만 세속사람보다 더한 욕심 때문에 나라의 보물을 외국인들에게 헐값에 팔아 재산을 모았고 사망할 때는 몽땅 도둑맞아 재산 한 푼이 없었던 인간 왕원록. 그도 한때는 이 고을의 명사요 부자로서 잘 나가는 때가 있었겠지만 역사가 흐른 지금은 민족의 반역자가 되고 역사의 죄인이 되어 세인의 조롱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순간의 미혹과 어리석음이 자신을 천고의 죄인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그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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