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癖針, 50~60년대 중국에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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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癖針, 50~60년대 중국에서 활용”
  • 승인 2006.11.1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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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2세 이성원 선생 증언

북만주로 이주한 조선의사로부터 전해진 癖針이 50~60년대 중국지역에서 임상적으로 활용됐다는 사실이 당시 시술을 했던 독립유공자 李成元 선생(73·전 조선족 집체농장 주치의사 및 병원장·사진)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은 국제협력연구로 진행하는 ‘해외소재 한국의학 지식자료 조사연구’일환으로 ‘일제강점기 항일민족의료인의 고뇌와 행적’ 주제의 초청강연회를 지난 9일 경희대 한의학역사자료관에서 개최했다.

한의학연구원과 경희대한의대 학연협동과정 대학원생들이 참석한 이날 강연회에서 이성원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간부였던 부친 故 李楨 선생과 당시 독립운동 활동상을 소개하고, 자신이 조선 침법과 한약을 활용했던 경험을 소개했다.
이 선생이 증언한 당시 독립운동의 성격은 무력 항일투쟁 뿐 아니라 문화사업 및 의료사업 등 비무력투쟁이 함께 진행됐다. 이 때 조선의료인이 척박한 의료환경에서 의술을 펼쳤으며,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한 대다수 조선족 지식인·의료인이 남아 활동했다고 증언했다.

이성원 선생은 흑룡강성 佳木斯의학원 졸업(1955년) 후 조선족 집체농장 주치의사 및 병원장으로 활동하다 1988년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했다. 양의학을 공부했지만 독학으로 한약을 사용하고, 당시 북만주로 이주한 조선의사로부터 벽침을 배웠다.
다음은 그의 임상경험이다.

“50~60년대 농촌 소아들에게 가장 흔한 질병이 설사병이었다. 처음에 양약을 이용해 치료했으나 만족할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8월 중순~11월 중순 가을 설사는 양약으로 멎질 않았는데 창출·백출·저령·부자·등심·감초 등으로 구성된 한약처방으로 효과를 보자 인근 큰 병원에서 치료를 못한 설사환자들까지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약으로도 잘 낫지 않는 극심한 설사 환아들은 벽침으로 치료했다. 한번은 얼굴이 노르스름하고, 퍼렇고 거품이 섞인 설사를 계속한 아이가 있어 해 뜨기 전 우상복부에 삼릉침으로 자침한 뒤 소독하는 벽침요법을 시행한 결과 2회 치료 후 완치되고 3회 치료 후 체중이 불어났다. 벽침의 효력은 매우 강력했고, 그래서 두루 응용했다.
같은 시기 홍진(홍역)이 유행해 소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는데 해열제를 처방하는 서양의학 치료를 하자 오히려 열꽃이 피지 않아 위독한 상태에 이르는 상황을 수차례 경험했다. 한의서를 보고 연구 끝에 한약을 사용한 결과 더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이날 세미나를 진행한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이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벽침은 ‘癖’이라는 영양불량 상태에서 설사·고열이 나타나는 병적 상태에 시술하는 침법으로, 고서에 나타나지 않은 조선의 전통 침법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했다.
차 교수는 “조선의료가 독립운동과 함께 중국으로 전파되어 임상적으로 활용된 과정을 밝혀 준 사례로 의미가 있다”고 지적하고 “특히 당시 의료를 고증해 줄 자료가 부족한 상황인데, 조선에서 전파된 ‘벽침’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의학사를 더욱 정밀하게 할 수 있는 의미를 더했다”고 말했다.
이성원 선생의 부친 李楨 선생은 北路軍政署 김좌진 장군 휘하의 연대장으로 1943년 만주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했으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민족의학신문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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