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4) | 고려인삼과 고구려인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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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4) | 고려인삼과 고구려인삼
  • 승인 2009.11.1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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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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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인삼은 단단하고 희며 기운과 맛이 상당삼보다 부드럽다. 다음으로는 고려산을 사용하는데 고려는 바로 요동이다”

人蔘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 상품이다. 역대로 ‘고려인삼’ 하면 명품에 속했고 외국에 보내는 예물에는 반드시 인삼이 포함됐으며, 외국에서 조선에 요구한 물품의 첫번째가 인삼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일이다. 1948년 2월 부산 동래를 출발한 조선통신사를 태운 배가 대마도를 지나 악포라는 곳에 정박하고 있을 때, 배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그 배에 실린 예물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특히 일본의 국왕 및 영주들에게 주기로 된 인삼 74근이 불에 타버린 것이다. 인삼은 조선에서 일본에 가져가는 가장 귀중한 예물이다. 부리나케 수습했으나 47근밖에 채우지 못해 급기야 조정에까지 알려지고 말았다. 예물을 조달하던 예조에 비상이 걸렸고, 정부 관청들이 보관 중인 인삼을 그러모으다시피 했으나 요구량을 채우지 못했다. 결국 조정이 공금을 들여 시장에서 인삼을 사 모은 끝에 겨우 물량을 맞췄다. 인삼 때문에 조정이 그야말로 발칵 뒤집힌 사건이다.

일제 강점기 때 상해에 조선 상인들이 많이 건너가서 활동했는데, 대부분이 인삼상과 비단상이다. 1909년 그 해 3월까지 집계만으로 인천에서 상해의 직항선을 통해 상해로 수입된 인삼의 총량이 12,000근이었다고 하니까 육로나 옌타이를 거쳐 가는 무역항로까지 합하면 그 수출량은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대부분 상해에서 소비된 것이라고 하고 특히 상해에 조차지를 가지고 있는 유럽 열강들의 외교관 저택에 상당량이 팔려갔다고 하니까 당시 고려인삼의 유명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인삼을 역사적으로는 ‘고려인삼’이라고 불렸다. 이 ‘고려인삼’의 명칭은 도홍경(陶弘景 452-536)이 지은 <본초경집주>에서 처음 나온다. “인삼은 백제의 것을 중요시하는데 모양은 가늘지만 단단하고 희며 기운과 맛은 상당삼보다 부드럽다. 다음으로는 고려산을 사용하는데 고려는 바로 요동이다. 모양은 크지만 속은 성글고 연하여 백제의 것보다 못하다. 백제는 현재 고려의 신하국이므로 사신이 가져오는 것은 고려산과 백제산 두 가지이다. 오로지 사용처에 맞추어 골라 사용할 뿐이다. 실제로 사용해 보면 (중국의) 상당삼보다는 못하다.” 이 문헌의 기록 이래로 중국의 거의 모든 본초학서에서 고려인삼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갈 사항은 문헌에 나오는 ‘高麗’라는 명칭은 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아닌 高句麗의 당시 이름이다. 만약 우리가 사용하는 ‘고려인삼’이라는 표현이 이 문헌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고구려인삼’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고려라는 명칭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정착된 지 오래라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이제 와서 굳이 ‘고구려인삼’으로 이름을 바꿀 것까지는 없지만, 여하튼 그 유래와 동시에, 상당히 오래 전부터 중국에 알려진 ‘명품약재’였다는 것은 알아두어야 할 듯하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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