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11) | 종이혁명과 한국한의학의 관계②
상태바
Story & History(11) | 종이혁명과 한국한의학의 관계②
  • 승인 2010.01.30 09: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웅석

차웅석

mjmedi@http://


“향약집성방이 간행될 때까지 근 300년은 ‘향약’이 의학의 모토가 됐고, 종이혁명으로 조선 의학계는 분수령을 맞았다”

1093년 어느 날, 고려 정부에서 소장하고 있던 의서 십수 종을 실은 가마가 고려의 사절단과 함께 당시 중국 송나라 황제 철종 및 중국 고관들이 배열한 곳에 도착하였다. 황종의를 대표로 하는 고려의 사절단은 이때 만큼 중국 정부로부터 특사 대접을 받은 적도 없었던 듯 하다. 그 가마 안에는 중국의서이면서도 중국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영추>81권의 완전한 책 한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북송 정부는 1057년 교정의서국을 설치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의서를 간행하여 배포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황제내경>을 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문>은 궁중 서고에 있는 당나라 때의 王冰이 주석을 단 판본이 남아있었지만, <침경>이라고도 불리는 <영추>는 이미 구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국에 수소문을 한 끝에 겨우 고려 정부에서 완전한 한질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다른 서적들과 함께 특급 호위를 받으며 중국 황제 앞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황제내경>의 <영추>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에서 소장하고 있던 <영추>가 중국으로 고이 모셔진 이 일화는 북송 정부가 중국 전역의 의학정보를 발굴하고 수집 정리하여 책을 통해 전국적으로 배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사건이면서, 기록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나라의 특징을 반영해준 의미 있는 사건이다.

종이혁명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와 연결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중국의 <태평성혜방>의 전래를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의학계의 조류를 바꿔 놓은 중요한 사건이다. 중국의 대규모 의료정보 DB의 성격을 갖는 <태평성혜방>을 포함하여 책으로 간행된 중국의서는 간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선을 타고 한국에 건너오게 된다. 당시 치료기술이나 치료약재의 종류 등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했다고 보여지는 우리나라에 이 책들에 실린 다양한 처방들은 당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게 된다. 그 이전의 의서에서는 보도 듣도 못한 다양한 치료기술은 사람들에게 이 책에 나온 처방을 써보고 싶은 충분한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그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상선을 통해 수입된 중국의 약재는 점점 귀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입약재의 고가 거래는 동일한 약효의 약재를 국내에서 조달해야 할 필요성을 가져왔고 그때부터 약재의 자급자족 노력이 조금씩 시작된다. 우리나라의 도라지가 중국의 桔梗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지네는 蜈蚣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전국 산야의 삽주뿌리는 白朮이라는 이름으로 거래되는 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개발된 국내 약재를 중국에서 수입되는 ‘唐藥’에 상대되는 이름으로 ‘鄕藥’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1443년 조선 정부에서 <향약집성방>을 간행할 때까지 근 300년 동안은 한국에서 ‘향약’이라는 단어가 의학의 모토가 된 시대인데, 종이혁명이 가져다 준 한국 의학계의 큰 전환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