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우리과학] 측우기와 수표
상태바
[우리문화 우리과학] 측우기와 수표
  • 승인 2003.04.21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현대 기상관측의 개념 600년 전에 싹텄다
왕도정치 실현 위한 기우적 측면이 제작 이유

5월 19일은 '발명의 날'이다. 그러나 이날을 왜 발명의 날로 정했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은 바로 '측우기'가 발명된 날이다.

수리시설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농업사회에서 강우량은 풍흉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측우기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강우량 측정방법은 비가 온 뒤 풀뿌리를 뽑아 보거나 땅을 파 보아 빗물이 얼마나 땅 속 깊이 스며들었나 살펴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은 지역에 따라 흙의 건조하고 습한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믿을만한 방식이 되지는 못했다. 이에 좀 더 과학적으로 강우량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장치인 '측우기'가 세종 24년(1442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는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선 것이었다.

게다가 이 측정방법을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강우량 측정법과 비교할 때 자를 따로 씀으로 인한 부피의 증가에서 생기는 오차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차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측우기는 깊이 2척(41cm), 지름 8(16cm)촌의 철제 원통과 돌로 만든 측우대로 구성돼 있는데, 통 속에 고인 빗물을 주척으로 측량하였다. 주척은 나무 또는 대나무로 만들어 썼는데, 그 길이 21.27cm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 때의 강우량은 푼(분 : 약 2mm)단위까지 측량해 보고했으며, 비가 온 시간, 微雨 細雨 小雨 下雨 灑雨 驟雨 大雨 暴雨에 이르는 8단계로 세분된 비의 종류 등 관련항목을 자세히 기록하게 했다.

그리고 각 지방 도 단위 감영에는 철제측우기, 군 단위 관청에는 도자기로 만든 측우기를 설치하게 하였고, 관원이 자로 비의 양을 재어 중앙에 보고하고 기록하도록 했으며, 이 자료들은 서운관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이때에 벌써 전국적인 우량관측망을 만들었으니 현대적인 기상관측의 개념이 이미 싹트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강우량의 기록을 통계처리 함으로써, 영농과 전세의 징수에 원활하게 이용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나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당시에 강우량의 자료를 정책의 결정이나 집행과정에서 실제로 유용하게 이용했다거나 통계를 냈다는 기록은 없으며, 측우기의 사용도 세종 이후 저조해지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부활되었다.

이는 측우기의 제작목적이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기록하여 농사 등에 직접 이용하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홍수보다 가뭄이 큰 걱정거리였다. 농사가 거의 유일한 생산이었던 당시의 군주에게는 농업에 치명적인 가뭄은 크나큰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이런 직접적인 위협 이상으로 가뭄이란 당시의 사고방식에서는 중요한 정치 사상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농경사회의 윤리를 발전시킨 유교의 정치사상에 의하면,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화는 궁극적으로 정치의 잘못에서 비롯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으로 인해 심한 가뭄 등의 災異는 천명을 받아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잘못을 범하고, 정치를 잘못할 때 생겨나는 경고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종대의 측우기는 이러한 정치 사상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측우기는 세종의 가뭄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표현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방편의 하나였으며, 강우량을 통해 그해의 풍흉을 예측함으로써 정치가 얼마나 잘 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수단이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즉 측우기의 목적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통계처리라는 목적보다는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바탕 한 기우적인 측면이 더 강했다는 이야기다.

측우기 제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이었던 간에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기구로서 측우기는 우리나라의 독창적 발견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최근 중국의 학자들이 측우기가 중국의 발명이고, 현재 한국에만 남아 있는 측우기도 사실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학자들이 조목조목 반박해 이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해 냈고, 또한 분명한 사실은 중국에는 우량기건 측우기건 남아 있는 유물도 없고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역사적 기록도 없지만, 우리에게는 확실한 기록과 유물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중국학자들의 측우기에 대한 주장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일종의 오만에서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이 같은 중국학자들의 왜곡된 주장이 동아시아의 과학사를 연구하는 구미의 학자들에게 상당부분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와 학계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겠고, 측우기가 우리문화의 산물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자료들의 수집이 중요한 시점이다.

한편, 측우기와 함께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 바로 水標이다. 물 가운데 네모난 돌이나 나무에 尺·寸·分의 눈금을 새겨 세운 수표는 처음에 청계천의 마전교(이후 수표교로 불림) 서편과 한강변의 바위 위에 세워 유량을 측정하였다.

흐르는 강물이나 시냇물에 수표를 세워 수심을 측정하고, 폭우가 내리면 강물의 유속을 재어 봉화대로 그 속도를 알려줌으로써 하류지역의 피해를 줄이도록 했다. 이 또한 세계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수위측정에 대한 발상은 자격루 등의 수위측정 기술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예정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