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醫學遺蹟 探訪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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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醫學遺蹟 探訪記(2)
  • 승인 2004.03.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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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朱丹溪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유명한 사람이다. 丹溪先生의 本名은 震亨인데, 그가 태어난 赤岸鎭에 丹溪라는 시내가 있어 학자들이 丹溪翁 또는 丹溪先生이라 부른다.

그는 1281년에 태어나 1358년까지 78세를 살았는데, 금원4대가의 마지막 의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하루에 一千字씩을 암기하였다. 젊어서는 협객의 기질이 있어 不義를 용서하지 않았다.

30세에 의학에 뜻을 두어 《素問》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고, 36세 때 東陽 八華山의 許謙에게 나아가 儒學을 배웠다.

許謙은 朱子의 四傳弟子로서 朱子가 黃幹에게 傳하고, 黃幹이 何基에게, 何基가 王柏에게, 王柏이 金履祥에게, 그리고 金履祥이 許謙에게 傳하여 許謙은 朱子의 5傳弟子처럼 보이나 金履祥이 何基와 王柏을 師事하였으므로 통칭 4傳제자라고 부른다. 어쨌든 許謙은 朱子學의 正統을 계승한 당대의 碩學이었던 것이다.

허겸은 丹溪先生보다 11살 위였는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마을의 문을 떠나지 않은 것이 40년이었다. 公卿으로 여러번 벼슬에 추천을 받았지만,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許謙은 단계를 위해 天命과 人心의 비밀, 內聖外王의 微意 등을 밝혀 주었는데, 단계는 이를 듣고 스스로 과거의 어리석음과 미혹함을 후회하고는 식은땀이 나는 것이 비오듯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그는 매일 밤을 세워가며 공부하여 학문이 순수하고 정밀해져서 天理와 人欲의 관문(理欲之關), 진실과 거짓의 한계(誠僞之限)를 확실하고도 엄격히 구별하였으며, 터럭만큼도 구차하게 자기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뒤 단계는 45세때 본격적으로 의학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아 떠났고, 錢塘江을 건너 북으로 가서 蘇州 宣城(안휘성 소재), 鎭江, 南京 등을 돌아다녔지만 良師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길에 항주의 武林에서 羅知悌를 만나 공부를 배우게 되고, 47세되던 해에 羅知悌가 卒하자 그의 장례를 치르고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단계는 고향에 돌아와 許謙의 병을 치료하고 周易, 禮記, 通書, 正蒙 등을 참고하여 內經의 이론을 바탕으로 相火論과 陽有餘陰不足論을 지어서 發表하자 그의 醫名은 세상에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丹溪先生의 저서로는 《宋論》 《格致餘論》 《局方發揮》 《傷寒論辨》 《外科精要發揮》 《本草衍義補遺》 《風水問答》 등이 있는데, 山川의 地理를 論한 《風水問答》을 지었다는 것이 좀 특이하다.

先生은 최초의 舌診 전문서인 《敖氏傷寒金鏡錄》을 지은 杜本(字 伯原, 淸碧先生)과 往來가 있었다. 杜本은 본래 丹溪의 스승인 羅知悌와 아주 친하였다. 兪弁이 쓴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오고 있다.

“元나라의 杜淸碧은 武夷山에서 道를 배우고 源에 이르렀는데, 腦疽病이 생겨 스스로 약을 썼지만 낫지를 않았다. 丹溪先生이 가서 보고 이르기를 ‘어째서 防風通聖散을 복용하지 않습니까’ 하니 淸碧이 이르기를 ‘이미 4貼이나 복용했네’ 丹溪가 이르기를 ‘어째서 술로써 法製를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자 淸碧이 깨닫고 그대로 복용하자 병이 바로 나았다. 이로부터 丹溪先生을 心服하게 되었다.”
先生은 또한 《醫學綱目》을 지은 樓英의 아버지와 아주 친하여 돌아가셨을 때, 樓英은 아버지의 命을 받들어 義烏에 가서 조문을 하였다.

先生의 墓는 文化大革命期 때 훼손이 되었으나 1979년 겨울 東朱村의 마을 사람들이 자금을 모아 重修하였고, 1982년 義烏縣 衛生局, 文化局, 科學技術協會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擴建하였다.

3차 답사는 지난해 7월 9일에서 14일간에 걸쳐 이루어 졌으며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 약 36명이 참여하였다.

모든 참가자들이 2박 3일간 張家界를 관광한 후에 북경으로 돌아와 가족들은 북경을 관광하게 하고 한의사들만을 中心으로 본격적으로 의가들과 그 유적지 답사를 시작하였다.

7월 12일 금요일, 관광버스를 타고 북경을 출발하여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편작의 고향인 河北省 任丘市 막州鎭에 있는 扁鵲廟였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편작의 고향을 渤海郡 鄭人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대체적으로 鄭은 막의 誤字로 보고 있으며 지금의 河北省 滄州地區에 있는 任丘의 막州로 보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扁鵲은 전국시대 때의 뛰어난 醫家로 醫學의 鼻祖로 일컬어지고 있다. 사마천이 지은 史記에 倉公 淳于意와 함께 유일하게 列傳이 있다.

扁鵲列傳에는 扁鵲이 長桑君으로부터 醫術을 傳受받아 見垣之醫(上地之水로 藥을 服用한 후 담 너머의 물건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람의 五臟六腑를 透視하여 診療를 하였다는 뜻)가 되는 과정, 趙簡子의 잠자는 병을 아무 탈 없이 깨어날 것이라고 診斷하는 것, 괵太子의 尸厥病을 치료한 것, 齊桓侯(지금은 蔡桓侯의 잘못으로 보고있다)의 病이 주理, 血脈, 脾胃, 骨髓로 깊어가는 것을 診斷한 것, 六不治에 대한 이야기, 邯鄲, 洛陽, 咸陽에서 의사노릇을 하고 마지막에 秦太醫令 이혜(李醯)에게 살해당하고, 脈診의 뿌리가 扁鵲(至今天下言脈者 由扁鵲也)이라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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