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협 창립50주년 기념특집(2) - 갈등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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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협 창립50주년 기념특집(2) - 갈등과 대응
  • 승인 2004.03.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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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한약·의료 3대 전선 수호 투쟁
한의학 노리는 세력 갈수록 팽창, ‘위기’ 여전

허술한 법·제도, 고립화된 구조로 힘의 한계
전략적 대응 필요성 절감… 개혁의 자양분 돼야

연재순서
1) 외연의 확장과 내포적 발전
2) 갈등과 대응
3) 평등의료운동의 성과와 과제
4) 한의협 조직의 발전과 한계
5) 세계로 미래로 가기 위한 조건

사진설명-한의협은 1만 한의사의 힘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한의학 수호투쟁을 전개했지만 힘의 절대적 한계로 수세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다.(사진은 1996년 5월 3일 정부과천청사 앞마당에서 삭발하는 고광순 원장의 모습)

처음부터 분쟁의 씨앗 잉태

한의협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제도권의료에로의 끊임없는 진입의 역사라는 측면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침탈에 대응한 한의학 수호투쟁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의사제도가 탄생하기 전후부터 지금까지 한의계를 관통하는 주요한 사건은 외부의 한의학 침탈에 대응해서 한의학을 여하히 수호해내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사실 한의학은 ‘과학’으로 무장한 서구열강의 서세동점이란 시대적 조류 속에서 주류의학의 지위를 잃고 차츰 보조적 의학으로 전락하다가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되면서 의료인의 지위를 완전히 잃고 의생의 지위로 격하되어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 과정에서 주류의 지위를 독점한 양의사와 양약사는 법적 제도적 지위와 서양의 과학문명을 내세워 한의학을 비과학 내지 미신, 혹은 민간요법 정도로 치부하고 한의사제도의 부활을 극력 저지하였다. 양방의 한의학 비하, 부정, 말살 책동은 대한한의사회의 설립 전후에도 여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한의계와 한의학의 가치에 눈뜬 일부 선각자의 노력, 그리고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부족한 의료인력의 보충 필요성 등 시대적 요구가 맞아떨어져 가까스로 한의사제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껏해야 한두 가지의 법조문에 ‘또는 한의사’라는 조항 하나만 달랑 삽입됐을 뿐 다른 의약관련 법률과 하위법에 의료인으로서 한의사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하더라도 모호하게 규정했으며, 나아가서는 한의사의 권리조차 양의사와 양약사의 포괄적 권리로 인정하는 듯한 폭거로 인해 이후 한의계는 끊임없는 분쟁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분쟁 전선의 확대

일제의 조선의료령-대한민국정부의 국민의료법-의료법으로 이어져내려오는 의료관련법과 약사법의 큰 줄기에서 한의학과 한의사의 지위와 영역을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은 결과 한의사는 두 가지 유형의 분쟁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가 메이저그룹인 양의사·양약사와의 갈등이고, 두 번째는 마이너그룹인 침구사 등과의 갈등이었다.

마이너그룹이라 해서 위협의 강도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초기에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지면서 정규 한의사 배출교육기관인 한의과대학을 나오지 못한 침구사, 한약업사 등이 제도권 한방의료인에 편입되지 못함으로써 이들이 한방의료의 외곽에서 한의사의 권리에 끊임없는 공세를 퍼부으면서 침탈을 시도한 것이다. 침분야에서는 침구사, 수지침, 맹인안마사, 중의사 형태로 중층화되고, 한약분야에서는 한약업사시험 재개, 개소주집, 건강식품 등으로 난립하여 분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메이저그룹은 역시 양의사와 양약사였다. 우선 양약사는 한약도 약이라고 주장하면서 한약조제권을 놓고 한의계와 충돌하였다. 한의계는 한약의 원리와 국민정서를 등에 업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국회부대결의나 대정부건의안 채택을 이끌어내는 등 때때로 희망을 이어갔으나 약사법 자체가 서양약 중심으로 제정된 탓에 법리논쟁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궁지에 몰린 한의계는 한의학 5천년사상 최대의 저항인 한약분쟁을 통해 한약사제도를 탄생시키는가 했더니 한약사를 양성하는 한약학과의 교육주도권을 양약대학에 뺏김으로서 팽팽한 대결양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양의사는 양의사대로 한의사의 목을 죄고 있다. 법적 제도적으론 목을 죄고 때론 모독하면서 국민적 지지정서를 허무는 데 주력했다.

양의계는 자신들의 입장을 의료일원화라는 형태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양의계는 90년대 초반 보건복지부가 의료일원화를 공식 철회하면서 우회적으로 한의계를 압박했다. 한약분쟁과정에서 약사법에 의료일원화의 전단계로서 한방의약분업을 설정했고, 한의학의 경제적 가치를 인지한 개개 양의사들은 한·양방 협진이라는 명분으로 병원에 한방병·의원을 부설함으로써 궁극적 일원화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 한의학을 둘러싼 갈등의 대치전선은 크게는 마이너그룹과 메이저그룹으로 나눠지고, 작게는 침을 둘러싼 무자격자전선, 약을 둘러싼 양약사전선, 침과 의료의 일원화를 둘러싼 양의사전선 등 3가지 전선으로 나눠졌다.

사활을 건 수호투쟁을 했지만…

한의협은 창립 전후로부터 지금까지 3대전선에서 대치하면서 한의학 분리시도에 대응해서 한의학의 기본틀을 수호하는 투쟁에 매진해왔다. 시대적 조류에 거슬러서 국가적 지원 없이 그야말로 단기필마로 거대한 세력에 대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걸고 필사의 생존투쟁을 함으로써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체 힘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양의과대학의 시설이 부족하여 폐쇄위기에 처했을 때 한의협의 모금액이 목표액인 3천만원 중 겨우 기십만원에 불과해 결국 경희대학교를 고황재단에게 넘겨준 사건이나 반복되는 침구사법 국회발의를 허용한 것, 주기적인 양의계의 한의학 모독사건, 한약분쟁이라는 대규모 전쟁에서 이기고도 막판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것 등은 한의계의 힘의 한계를 드러낸 경우들이다.

비상사태가 터질 때마다 한의협을 중심으로 한 한의계는 성명전을 필두로 항의농성, 항의방문 등의 투쟁방식을 전개했으나 힘의 절대적 부족탓과 함께 사회가 점차 합리화되는 추세에 부응한 세련된 투쟁방식을 습득하지 못해 결정적 승기를 잡지 못했다.

구태의연한 투쟁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원인 중에는 사학재단에 숨어있는 한의대의 무기력증과 무책임성, 전통적 방식에 젖은 임상가와 객관적 입증방식을 선호하는 병원교수간의 괴리, 개원의 중심의 한의협 운영, 개별화된 한의원 중심의 임상시스템 등이 자리잡고 있다.

분쟁이 가져다준 폐해

또한 한의계는 외부집단과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자생력을 길러온 측면도 있지만 왜곡·변형되어 정체성을 상실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가령 한방병원의 분과체계가 양방중심으로 편재됨으로써 기존 개원한의사의 관행과 마찰을 빚음으로 해서 병원과 대학 교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한의학회가 한의학 발전을 주도하지 못해 한의학술이 공동화된다거나 독립적 학회활동이 용인되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그 연장선인 한의사전문의제로 마찰을 일으켜 한의계 대표단체로서의 한의협의 구심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분쟁이 계속되는 사이에 한의협 예산의 많은 부분이 의권옹호비용으로 충당된 나머지 연구와 교육, 정책 개발비의 협소화로 귀결되어 한의학문의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다. 회관의 부재는 분쟁과정으로 찌들은 한의협 살림살이의 현주소일 뿐만 아니라 한의사 회원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 사회적 위상에 걸맞는 형식적 요소가 결여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의대는 분쟁시마다 각종 시위의 일선에 나섬으로써 교육에 매진할 수 있는 절대시간이 감소한 결과 한의계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한의학 교육은 피폐함으로써 우수한 인력의 한의대 유입이라는 호재가 생겼는데도 양질의 인력배출에 성공치 못함으로써 한의 각 단체와 연구기관, 교육기관, 공공기관에 충분한 인력을 공급하지 못해 한의학의 발전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분쟁은 이뿐 아니었다. 한의사 사회에 만연한 피해의식이라든가, 만연한 비밀주의로 매사를 공론화하지 못해 회원간 결속력이 떨어지는 현상, 사학교육의 벽을 뛰어넘지 못함으로써 한방의료가 개인이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한 문제, 내부 자율정화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회원간 유·무형의 갈등구조가 고착화된 것 등은 분쟁이 가져다준 폐해들이다.

분쟁에 대한 전통적 인식 변화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후유증은 한의학이 현대교육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전통적인 분쟁요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차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양의약계와 다투는 사이 자생적이 신장하여 자발적으로 서양의약의 장점을 수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의학의 자생력에 회의감도 감지되었다. 현재의 교육·연구체제로는 한의학 발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양방 협진의 불가피성을 피력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일원화로 가는 것도 장기적인 한의학 발전에 좋다는 게 후자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한약에 대한 인식에도 마찬가지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한약의존도가 언제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니므로 서서히 진단과 치료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인식이 한약분쟁을 기점으로 고양돼 왔다. 이런 논의는 아직 공론화단계에 접어들지 않았으나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중이다.

침구는 40년간 분쟁이 진행되면서 특히 많은 변수가 발생한 분야다. 한의사제도가 없는 미국과 유럽을 침의 연구가 진행된 결과 서양의학의 한 치료분야로 공인된 침을 국내 양의사가 역수입하는 현상도 하나의 변수이다.

또한 오래 전부터 진행돼온 서비스시장 개방의 결과 한의사의 국제적 지위문제가 또다른 변수가 되고 있다. 국내외적 문제가 교차하는 한의사제도는 과거의 단순한 분쟁을 한층 더 복잡한 양상으로 몰고 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과거와 같이 항의와 분노를 표시하는 식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해관계가 복잡해질수록 정서적 호소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 문제를 푸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의협 50년을 겪으면서 한의사들은 미봉적이고 주먹구구식의 대응으로는 아무 것도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런 귀중한 교훈은 이후 한의협 개혁의 귀중한 자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음호에 계속)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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