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4) - 윤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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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4) - 윤창열
  • 승인 2004.08.2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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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皇天上帝께 天祭를 올리던 天壇 □

① 天壇 槪觀

점심을 마치고 우리는 천단의 남문에서 내려 천단 관람을 시작했다.
天壇은 明·淸代의 皇帝들이 하늘에 계신 皇天上帝에게 天祭를 올리던 장소로 옛날의 皇帝는 上帝의 아들로써 天子라 이르고 “受命于天”하여 人間을 통치하므로 上帝에 대한 제사는 대단히 중요하였다.

天壇은 1420년 처음 건설되었을 당시에는 天地壇이라 하여 天地에 대한 제사를 모두 이곳에서 거행을 하다가 明나라 嘉靖 9년(1530년) 자금성 북쪽에 地壇(方澤壇)을 별도로 세운 후에는 天地에 대한 제사를 나누어 지냈다고 한다.

지금의 자금성을 中心으로 남쪽에는 天壇이 있고 북쪽에는 地壇이 있고 동쪽에는 日壇이 있고 서쪽에는 月壇이 있었는데 이는 乾南坤北에 離東坎西의 배치로 伏羲八卦의 위치와 동일한 모습이다.
복희팔괘는 天地는 縱으로 體를 이루고 日月은 橫으로 用을 이루는 自然의 모습을 나타내는데 北京의 四壇의 모습이 이와 정확히 符合하고 있다.

天壇은 두 겹의 담으로 쌓여있어 回字의 모습을 이루며 북쪽의 담장은 둥근 아치형을 이루고 남쪽의 담장은 네모난 모습을 이루어 天圓地方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 外壁은 西門만이 皇帝가 출입하는 正門이 되고 內壁에는 동남서북에 4개의 門이 있고 각각의 명칭이 泰元門, 昭亨門, 廣利門, 成貞門으로 周易乾卦의 四德인 元亨利貞으로써 명명한 것이다.

明·淸代때 皇帝는 매년 두 번은 반드시 天壇에 가서 天祭를 올렸다 한다.
첫 번째는 冬至날로 원구단(원丘壇)에서 上帝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고 두 번째는 孟春(正月 上辛日, 또는 正月 15日)에 기년전(祈年殿)에서 皇天上帝께서 五穀이 풍년들고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다.
이 외에도 여름에 가뭄이 들면 夏至에 원丘壇에 와서 상우례(常雩禮) 혹은 대우례(大雩禮)를 특별히 드렸다 한다.

이 天壇은 神聖不可侵의 聖所로써 일반인들의 出入은 엄금하였으며 특히 여자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였다 한다.
1860년 英佛聯合軍이 北京을 침입했을 때 天壇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1900년 八國聯合軍이 북경을 침입했을 때는 이곳에 兵營과 司令部를 설치하여 다시 한번 짓밟히게 되었다.

1914년 袁世凱는 황제가 되기 위한 여론조성을 위해 마지막으로 天祭를 올렸고 그 후 1918년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한다.
天壇은 자금성에서 正南쪽이 아닌 正南에서 약간 東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이는 正南은 陰이 始生하므로 陽이 가장 극성하면서도 陰이 없는 方位를 선택한 것이라 한다.

② 원丘壇

우리는 南天門인 昭亨門을 통하여 進入을 하였다.
天壇은 크게 원구단과 祈年殿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中間에 원구단의 위패를 봉안하는 황궁우(皇穹宇)가 있고 祈年殿의 뒤에 역시 위패를 봉안하는 皇乾殿이 있으며 서쪽에 皇帝가 와서 致齋하는 齋宮이 있다.

昭亨門을 막 통과하면 왼쪽에 天壇의 모형도가 그려져 있다.
이 원구단은 속칭 祭天臺라고 하는 곳으로 이곳이 명실상부한 天壇이다.
이 壇은 명나라 嘉靖 9년(1530), 淸나라 乾隆 14년(1749년)에 확장·재건되었다.

원구단은 3층으로 되어있고 동서남북마다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도 역시 3층으로 되어있는데 매 층마다 9개의 계단으로 되어있다.
또 주위의 난간도 上層이 36개, 中層이 72개, 下層이 108개로 모두 9의 倍數로 되어있으며 合하면 216개로 역시 9의 배수가 된다.

또한 가장 윗 층의 中心石(天心石 혹은 太極石이라고도 한다)을 중심으로 첫 번째 둘레에는 9개의 石板이 깔려 있고 둘째 둘레에는 18개, 셋째 둘레는 27개 …… 이렇게 하여 마지막 9번째 둘레는 81조각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층은 10번째 둘레로 90개의 석판으로부터 18번째 둘레의 162개의 조각으로 되어있으며 맨 아래층은 19번째 둘레로 171개의 석판으로부터 27번째 둘레의 243개의 석판으로 되어있다.
이 세층의 石板數를 모두 合하면 378개의 9로 모두 3402개이다.

그리고 최상층의 직경은 9丈이고 중간층의 직경은 15丈이고 맨 아래층의 직경은 27丈으로서 모두 合하면 45丈이 되는데 이는 9·5가 되어 周易 乾卦의 九五帝王之尊의 의미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九 또는 九의 倍數로 원구단을 건설한 이유는 첫째 皇天上帝는 九重天 속에 臨御해 계시기 때문에 九 또는 九의 배수로 九重天을 상징하여 天體의 至高至大함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 동양철학에서 홀수는 陽數이고 짝수는 陰數인데 하늘은 陽이 되고 땅은 陰으로 天壇은 祭天하는 곳이고 九는 極陽數가 되므로 九로써 가장 높은 하늘을 상징하며 가장 吉祥의 數字로 삼았다는 것이다.

원구단의 맨 윗 층 중앙에 있는 天心石은 天祭를 올릴 때 讀祝官이 이곳에서 祭文을 읽었다고 하는데 축문소리가 왕왕 울려서 마치 天神과 交流하고 天人이 合一하는 경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이 돌 위에 서서 가볍게 말을 하더라도 자신이 듣는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리는데 이는 共鳴性回音 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둘레에 서있는 사람은 이러한 느낌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天心石으로부터 퍼져나간 音波가 네 면의 돌기둥과 돌 판에 부딪힌 후 동시에 네 면으로부터 재빨리 반사되어 돌아오기 때문에 音波의 진동이 비교적 크며, 또 원구단의 반경이 비교적 짧기 때문에 반사도 아주 빠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측정에 의하면 소리를 낼 때부터 音波가 다시 圓心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모두 0.07초라고 한다.
말하는 사람은 그 原音과 메아리를 분간할 수 없기 때문에 天心石 위에 서있는 사람은 특별히 우렁차게 들린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上天垂象”, “萬衆歸心의 吉兆”라고 하였다.

또 이 돌은 “億兆景從石(억조창생이 앙모하여 따르는 돌)”이라는 명칭도 있는데 황제는 이 돌 위에서 皇天上帝의 保佑를 기도하고 억조 창생들은 皇帝의 뒤를 따르므로 皇帝가 發하는 뜻은 바로 上天의 뜻이고 天命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服從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원구단의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안쪽 담은 圓形으로 되어있고 바깥쪽 담은 方形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天圓地方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원구단의 관람을 마치고 영星門을 지나 皇穹宇로 향했다.
영성문은 동·서·남·북의 안쪽 담장과 바깥쪽 담장에 각각 3개씩 있으므로 모두 24개가 되는데 윗부분을 雲板으로 장식을 하여 雲門玉立의 別稱이 있다.

매 영성문의 크기는 각기 다른데 의식을 거행할 때 中間의 제일 높고 큰 것은 天帝의 專用이고 오른쪽의 좀 좁은 문은 皇帝가 出入하는 문이며 제사에 참여한 大臣들은 제일 좁은 문을 사용해야만 했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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