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변극, 한의원서 난임치료하며 교육에 힘썼다”
상태바
“독립운동가 변극, 한의원서 난임치료하며 교육에 힘썼다”
  • 승인 2022.12.15 06: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숙현 기자

박숙현 기자

sh8789@mjmedi.com


제3회 근현대한의학연구사 콜로키움 개최…제자인 손인철 원광대교수 등

 

[민족의학신문=박숙현 기자] 독립운동자이자 원광한의대 초대학장이었던 변극 교수의 일생을 돌아보며, 그의 학문적 토대를 연구하기 위한 기반을 논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경희대학교 청강한의학역사문화센터는 지난 13일 서울 정동 달개비 세미나실에서 제3회 근현대한의학연구사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이번 콜로키움은 독립운동가이자 원광한의대 초대 학장이었던 한의학자 변극을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제자였던 손인철 원광한의대 명예교수가 변극 선생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대담자로는 안상우 한국의사학회장이 참여했다.

손인철 교수의 이야기에 의하면 변극 교수는 한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유소년시절부터 한의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학문을 배웠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 휘문고보에서 야구부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후 불교단체의 장학금을 받아 중국 상해에서 동제학교에 입학했고, 동제학교 의학부에서 산부인과를 전공했다. 손 교수는 이에 대해 “동제학교의 ‘동제’라는 것은 독일을 한자음으로 기재한 것이다. 즉, 이 학교는 독일인이 학생을 가르쳤고, 그래서 학교 수업도 대부분 독일어로 진행됐다. 이에 변 선생님도 당시 독일어를 배우느라 고생하셨다”면서 “독일어에 능통하게 된 것이 훗날 전남대에서 독일어로도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변극 교수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상해 임시 정부에서 지금의 국회의원 격인 대의사 직책까지 맡았다. 이에 대해 안상우 회장은 “임시정부 시절, 김구와 나이도, 지위도 차이가 많은데, 원광대교내신문에 쓴 글에 따르면 ‘김구와 막역했다’고 했다. 상당히 대찬 인물이었던 것 같다”며 “당시 중국 활동을 하면서 유학생 그룹에서 리더를 맡았고, 중국인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만 전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화교를 압박했었는데, 변극선생이 힘을 써서 원광대에서는 중국인에게 한의대를 특례로 입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중국대사가 원광대 총장을 찾아와 감사인사를 전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을 하고 옥살이까지 겪었던 변극 교수는 귀향해서 고향에서 사비를 털어 학교를 설립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옆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충당했다고 한다. 손 교수는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한의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었고, 산부인과를 전공한 의사이다보니 전국에 부인과의사로 소문이 자자했다”며 “지금은 전남대가 된 당시 광주대에서 독일어와 문화사, 독립운동사를 강의했다”고 소개했다.

 

손인철 교수가 변극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전남대 교수직을 퇴임한 이후였다. 손 교수는 “그분이 교수였고, 그렇게 대단한 분인 줄 몰랐다. 체격도 왜소하고,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소박한 인물이셨기에 한의원을 운영하는 시골 할아버지라고만 생각했었고, 난임치료로 유명하셨던 것도 돌아가신 후에야 알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작은 거인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된다”고 회고했다.

그는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를 재학하던 중에 변극 교수를 처음 만났다. 당시 변극 교수는 전남대를 퇴직하고, 원불교에 귀의해서 간판도 없는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었다”며 “4~5월 경에 감나무에서 떨어진 땡감을 먹고 체해서 진료를 받았다. 진맥 잡고, 복진을 해보더니 괜찮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후일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본과 2학년 때 진맥이 어렵기에 어떻게 해야 진맥을 잘 알 수 있는지 여쭤봤는데, 단지 ‘진맥은 많이 해봐야 안다’고만 하셨다”고 전했다.

또한 손인철 교수는 변극 교수가 원광대 한의과대학의 설립에 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70년도 무렵, 원광대는 한의대를 설립하고 싶었지만 충분한 자원이 없었다. 이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립운동가였던 변극 교수를 만나서 원하는 것은 없느냐고 물었고, 이에 변극 교수가 원광대에 한의대를 설립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손 교수는 “당시 복지부에서는 한의대를 없애고 싶어하던 시기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변극 교수를 만나고 그가 귀해 보였는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1972년 문교부 당국으로부터 원광대학교 한의예과 설립인가를 받았다”며 “원래는 문리과대학 소속의 한의학과였는데, 1년 뒤 한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경희대가 문리과대학에서 한의학과가 된 것도 이 영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콜로키움에 참가한 사람들은 변극 교수의 일화와 임상처방 등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상우 회장은 “변극 교수가 유학 자금을 대기 위해 인삼을 구해서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외에도 당시 사람들이 인삼 따위를 간단하게 챙겼던 것 같다”며 흥미로워했다. 이에 이민호 한국한의학연구원 박사는 “당시 중국에는 13개의 약상 조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관동방이다. 그런데 이 관동방의 일원으로 조선상인이 많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변극 교수가 상해에서 활동 시기에 중국 약재시장이 활성화됐다. 기주 약시에서 활동하던 관동방의 주요상품 중 하나가 인삼”이라며 연관성이 있을 것 같다는 추론을 했다.

또한 김남일 경희한의대 교수는 변극 교수가 쓴 ‘향양집성방의 현대적 응용’을 언급하며 “향약집성방을 두고 처방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런 걸 보면 실제로 처방에 관심이 많았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안상우 회장은 “무조건적인 원전 수용이 아니라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본인 나름대로 번역을 하다보니 비과학적이거나 전문적이지 않은 내용이 있어서 이를 자신의 판단대로 수록했다고 기록했다”며 “본인의 경험이나 동서의학지식중에 실제로 필요하고 유용한 경험만 담은 것 같다”고 밝혔다.

또한 변극 교수가 당시 흔치 않았던 사상방을 활용했던 것을 토대로 사상의학을 어디에서 접했을지 추측해보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상해 유학 시절, 사상의학이 상해의과대학에서 교재로 간행된 것의 영향 ▲원광대에서 사상의학 책을 쓴 이도경 선생의 영향 ▲이제마를 철학계에 소개했던 전남대 이을호 교수와의 교류 등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토론자로 나선 국수호 세명한의대 교수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한의학에 독립에 대해서도 크게 관여한 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