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130) 전쟁이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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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130) 전쟁이 없는 삶
  • 승인 2023.07.14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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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김영호

mjmedi@mjmedi.com


◇김영호 한의사
◇김영호 한의사

며칠 전 즐겨보는 여행 유튜브 채널에서 불가리아의 시골이 나왔다. 장수마을로 알려진 그곳 분들에게 장수의 비결을 물어보는 영상이었다. 인터뷰 속 마을 분들은 공통적으로 좋은 음식과 평온함을 장수의 비결로 꼽았다. 특히 70대 할머니 한분은 평온함에 대해 ‘전쟁이 없는 삶’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는데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도 유럽 일부는 전쟁 중인데다 워낙 전쟁이 많았던 유럽이기에 전쟁이 없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고 장수의 비결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과거에 비해 전쟁의 위협이 확연히 낮아진 대한민국의 우리는 과연 평온하고 행복할까? 

국가 간의 전쟁을 직접 겪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매일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항상 전쟁을 대비하고 있는 전투태세의 긴장된 마음은 아닐까? 갑질 고객, 진상 고객과의 전쟁 뿐 아니라 뻔뻔하고 이기적인 수많은 빌런(villain)들, 아랫사람이나 주변인을 괴롭히는 직장 사람들과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전쟁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편안한 저녁을 보내야 할 집에서도 내일은 또 어떤 황당한 사건과 사람으로 격전(激戰)을 치를지 걱정 속에 잠드는 경우도 많다.

마음 속 전쟁이 극단적으로 얼마나 해로운지 보여준 사례가 있다. 1983년 미그기를 끌고 귀순한 이웅평 대위는 평생을 불안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다가 2002년 향년 47세로 별세했는데 그의 아내는 남편의 삶을 이렇게 회상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게 하고, 우리 집이 추정될 수 있으니 가게는 한 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 언제 어떻게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만큼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했어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져서 처방받은 약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 모두를 의심했죠.” 이처럼 극도의 스트레스로 간 기능이 급격히 떨어진 이웅평씨는 간 이식 수술까지 받았지만 독약일까 두려워 면역 억제제마저 복용하지 않다가 결국 이식 거부 반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에 귀순했지만 마음속에선 북(北)에 있을 때보다 더 큰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셈이다.


이웅평씨의 안타까운 사례를 보고 간고급(肝苦急)이라는 한방생리학 용어가 떠올랐다. 간을 괴롭게 만드는 급(急)이라는 단어는 흔히 급하다는 뜻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탈이 날까봐 겁이 나고 불안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웅평씨는 20여 년 동안 ‘急’한 마음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의 몸을 가장 괴롭힌 것도 바로 이 ‘急’한 마음이었으리라.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들 모두 각자의 상황 속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 마음이 전쟁 같을 때 우리의 간은 급(急)해진다. 이 마음이 점점 넓어질수록 우리는 장수와 멀어진다. 불가리아 어르신들의 장수 비결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마음 상태가 바로 ‘急’한 마음 이다. 나 역시 그렇게 급(急)했던 시절이 생각나 불가리아 할머니의 ‘전쟁 없는 삶’이라는 말이 남다르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사전을 찾아보니 ‘急’의 반대어는 서(徐:천천히, 평온, 조용)와 완(緩:느림, 느슨, 늦추다)이다. 마음속이 전쟁터 일 때 가장 필요한 것도 바로 느림과 느슨함이다.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신뢰와 인류애를 잃어가고 있다면 잠시 멈추고 불가리아 할머니의 장수 비결을 떠올리며 좋은 음식과 마음의 평온함을 되찾아보자. ‘急’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우리의 간은 좋은 음식을 먹으며 느슨하고 느리게 살 때 다시 건강해진다. 매사 조급해지거나,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고, 이유 없이 불안 초조하다면 백발백중 당신의 간은 ‘急’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전쟁터 한복판과 다름없다.

1922년 순회강연 차 일본을 방문한 아인슈타인은 호텔에 전보를 전하러 온 일본인 배달원에게 팁 대신 메모를 건 낸 적이 있다. 이 메모를 주며 “아마 운이 좋으면 이 메모가 보통의 팁보다 훨씬 가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2017년 경매에서 165만 달러에 낙찰되었던 이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a quiet and modest life brings more joy than a pursuit of success bound with constant unrest. (조용하고 소박한 삶은 끊임없는 불안에 묶인 성공을 좇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
 아마 앞으로 불가리스 요구르트를 마실 때마다 불가리아 할머니의 장수비결이 생각 날 것 같다. “지금 평온하니? 마음속이 전쟁터 인건 아니지? 모든 일은 결국 다 지나간단다. 너무 깊이 고민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말고 천천히 살아봐. 느리고 느슨하게. 그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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