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20) 국수 먹다가: 뜬금없는 능력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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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하기](20) 국수 먹다가: 뜬금없는 능력주의 비판
  • 승인 2024.03.0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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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순천 아랫장에는 맛있는 잔치국수를 파는 집이 있다. 멸치를 진하게 우려낸 육수는 해장용으로도 안성맞춤인데 딱 적당히 익혀낸 국수 양도 많아 푸짐하다. 테이블 6개 정도 놓인 작은 가게에서 중년의 부부가 일하시는데, 하루 종일 성실한 남편 사장님은 몸이 재빠르고 눈이 땡그랗고 다정한 아내 사장님은 중국 동포 말투를 쓰신다. 요즘은 국숫값도 엄청 올랐는데 이 가게는 여전히 넉넉한 한 그릇에 5천 원이라 가성비가 좋다. 몇 년 전 물가가 이만큼 난리 나기 전에는 4천 원에 ‘배고파요!’ 얘기만 해도 같은 가격에 곱빼기를 말아주셨다. 고작 국수 먹으러 순천까지 가나 싶겠지만, 어차피 구례 사람들 생활권은 인근 도시인 남원이나 순천까지를 포함한다. 병원을 갈래도, 큰 마트를 갈래도, 애들 필요한 거 좀 다양하게 고를래도 시골에는 없으니 차 타고 3-40분 나가는 거야 일도 아니다. 서울 사람들 보기에야 순천이든 남원이든 구례든 다 그냥 ‘시골’일 뿐이겠으나 아무튼 ‘시’와 ‘군’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게 도시에 나간 김에 국수 한 그릇 배부르게 먹고 들어오면 기분도 좋고 알뜰해진 것 같아 만족스럽다.

이 국숫집에는 아이가 이유식 먹을 때부터 다녔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기가 자라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오래 지나긴 했다. 그렇다고 다닌 햇수만큼 자주 가지는 못했다. 최근 몇 년 간은 고작 일 년에 한두 번이나 갔을까. 가뭄에 콩 나듯 그렇게 띄엄띄엄 가는데도 안사장님은 우리 아이를 기억하고는 아무리 바쁠 때라도 안부를 물어주셨다. 지난 주말에 국수 먹으러 들렀을 때에도, “키가 많이 컸네!” “학교에서 공부 잘하지요?”라며 에둘러 아이를 칭찬해주셨다. 아이가 더 어릴 때에는 식당에서 따로 파는 구운 계란을 꼭 하나씩 손에 쥐어주곤 하셨다. 계산을 마치고 출입문 앞에 서서 아이가 허리 굽혀 꾸벅 인사를 하면 다른 일 멈추고 서서 흐뭇한 얼굴로 아이를 배웅하곤 하신다. 그게 좋아 아이는 더 열심히 인사를 하고, 식당에서도 남기지 않고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국숫집에 들를 때마다, 아이는 저 혼자 자라는 것도 아니고 아이 부모(혹은 조부모 포함 가족) 혼자 키우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혈연도 지연도 아무것도 아닌 꼬마 하나가 자라가는 모습을 함께 보고 격려해주는 국숫집 사장님 같은 분들 덕에, 나도 그렇게 온전하게 자라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새삼 기억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길 잃고 헤맬 때 도와줬던 아저씨, 떨어진 지갑을 주워줬던 언니,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줬던 과일가게 할아버지 등등. 기억이 나기도 혹은 나지 않기도 한, 딱히 이해관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분들이 한 마디씩 해주었던 안부와 칭찬을 먹고 따뜻한 눈길을 받고, 손에 쥐어주는 구운 계란 한 알만큼의 관심으로 그렇게 우리가 어른이 되었고, 지금은 다시 이렇게 아이가 자라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이 종종 농담처럼 하시는 말씀 - “다 지 혼자 잘나서 큰 줄 알지” -은 뼈를 때리는 말이기도 하다. 혼자 잘나서 큰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부모나 조부모 능력만으로 어른이 되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으니, 눈곱만큼도 남의 덕 본 적이 없는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조그마한 친절이나 뜻밖의 위로, 격려 같은 것들이 단 한 번도 스쳐 지나가지 않은 인생이란 단언컨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새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능력주의(meritocracy) 신화는 사실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일 뿐이다. 개인의 능력, 성취, 기여에 따라 보상도 달라져야 한다는 믿음은 극단적으로, 노력한 자들만이 자격이 있으니 ‘열심히 해서 시험에 합격한 내 마음대로 그 권력 및 기타 등등을 행사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시험 한 번 통과하면 평생 특권을 누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루기로 하고, 한 인간이 그만큼 자라는 과정에 타인의 기여는 한 터럭만큼도 없었는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름 모를 누군가들의 기여가 있었다면 그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불문율 - ‘기브앤테이크’ - 아닐까 싶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중에 부모의 간절한(?) 소망처럼 우리 집 어린이가 제 밥벌이도 알아서 하는 훌륭한 어른이 되더라도, 살면서 받아온 남의 덕을 어떻게 갚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국숫집 사장님의 따뜻한 안부 인사와 칭찬 한 마디 같은 것들이 수도 없이 쌓이고 모여서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는, 사람 같은 사람으로 자라길 바란다. 행여 본인이 너무 잘나고 대단해서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오해하거나, 부모(또는 조부모)가 능력이 좋고 지원을 잘해준 덕일 뿐이니 내 성취는 나와 내 가족만이 누려야 한다고 착각하는, 그런 희한한 어른으로 자라지 않기를 부디 바란다.

 

신유정 / 인류학박사,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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