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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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제5차(2004년) 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29)
  • 승인 2006.03.2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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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황박물관 관람 □

돌아오는 길에 지광진열관(地광陳列館)이라는 곳을 잠깐 들렀다가 시간이 남아 예정에 없었던 돈황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에서 우리는 먼저 실크로드에서 돈황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① 동서의 문명길 실크로드

실크로드는 고대에 아시아를 가로질러 유럽과 연결하는 육상 무역로의 총칭이다. 1870년대에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 1833~1905)이 최초로 이 명칭을 사용하였고 그 뒤에 광범위하게 통용되었다.
이 길이 처음 형성된 것은 서한 이전이다. 서한 건원(建元) 2년(B.C. 139년)과 원수(元狩) 4년(B.C. 119년), 장건은 2차에 걸쳐 서역에 파견되어 중국과 서역 각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뒤의 실크로드의 초기의 모습이다.
이후 각 왕조는 기본적으로 이 노선을 통해 서역의 여러 나라와 왕래를 하였고 원나라 때에 이르러 점점 폐지하게 되었다.

실크로드의 주된 노선은 장안에서 농우(농右)에 있는 3개의 도로를 거쳐 하서(河西)에 진입하는 것이다.
하나의 길은 경수(涇水)의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지금의 경천(涇川), 평량(平凉), 고원(固原), 경태(景泰)를 지나 무위(武威)에 이르는 것이다.
다른 한 길은 위수(渭水)의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지금의 보계(寶계), 농현(농縣), 통위(通渭), 임조(臨조)를 거쳐 난주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길은 임조에서 지금의 임하(臨夏), 서녕(西寧)을 거쳐 편도구(扁都口)를 지나 장액에 이르는 길인데 세 길 모두 하서(河西)에서 만나고 다시 돈황으로 연결된다.
돈황에서는 다시 3갈래 길로 나누어지는데 남도(南道)는 양관(陽關)을 지나 약강(若羌)에 이르고 여기서 곤륜산맥의 북쪽과 티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을 따라 차말(且末), 화전(和田)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아프카니스탄을 지나 서행하거나 인도를 향해 남행하는 것이다.

중도(中道, 天山南路)는 천산의 남쪽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지나가는데 옥문관(玉門關)을 지나 누란(樓蘭)에 이르고 고차(庫車)·고묵(姑墨)·카스(喀什)를 거쳐 이란을 지나 지중해의 동쪽에 이르는 것이다.
북도(北道, 천산북로)는 천산산맥의 북쪽을 지나 서행하는데 투루판분지를 지나 카르기스스탄의 비슈케크에 이르고 카스피해와 흑해를 지나 유럽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주된 실크로드 노선인데 돈황은 실크로드에 있어서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장소가 되어 문명의 불꽃을 피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② 실크로드의 관문 양관과 옥문관

실크로드의 남도(南道)로 가기 위해서는 양관(陽關)을 지나가야만 한다. 양관은 돈황시의 서쪽 남호향(南湖鄕)의 서남쪽에 있는 고동탄(古董灘)에 위치해 있다. 한무제때 관을 설치했으며 옥문관의 남쪽에 있다하여 양관이라 하였다.
이곳은 지금 홍수의 충격과 풍사(風砂)의 침식을 받아 완전히 없어졌고 현재는 유지(遺地) 북쪽의 돈돈산(墩墩山) 위에 하나의 봉화대가 남아있을 뿐이다. 양관은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위성곡(渭城曲)에 의해 우리들의 마음속에 친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읍輕塵)하니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이라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進一杯酒)하라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이라.

위성(지금의 함양)의 아침비 살짝 내려 티끌을 적시니
여관집 버드나무 푸르름을 더하는구나
그대여 한잔술을 더 들게나
양관땅 벗어나면 아는 사람도 없으리니.

실크로드의 중도(中道)와 북도(北道)로 가기 위해서는 옥문관(玉門關)을 지나야만한다. 옥문관은 하창성(河倉城)을 대방반성(大方盤城)이라 하는 것에 반해 소방반성(小方盤城)이라고 부른다.
양관과 마찬가지로 한무제때 관을 설치하였으며 관성(關城)은 지금까지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옥문관은 호탄[和田]의 옥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어서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중국에는 옥이 산출되는 4대 명산지가 있는데 섬서의 남전옥(藍田玉), 하남의 독산옥(獨山玉), 요령의 수암옥(岫岩玉) 그리고 우전(于전)의 호탄옥[和田玉]이라고 하는데 호탄에서는 백옥(白玉)이 많이 산출되었다고 한다. 옥문관은 당나라 시인 왕지환(王之渙)의 양주사(凉州詞)에 의해 더욱 유명해졌고 왕지환도 이 시로써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황사원상백운간(黃沙遠上白雲間)하니
일편고성만인산(一片孤城萬인山)이라
강적하수원양류(羌笛何須怨楊柳)오
춘풍부도옥문관(春風不度玉門關)이라네.

모래바람 멀리 구름까지 날아오르니
만길이나 되는 기련산아래 외로운 성 있네.
변방의 피리소리는 어찌하여 양류곡을 슬피부는가.
봄바람도 옥문관을 넘지는 못한다네.

③ 현장법사의 구도의 길 실크로드

박물관 안에는 “현장서행구법노선도”도 그려져 있었다. 현장은 우리가 서유기를 통해 잘 알다시피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오고 역경사업에 평생을 바친 스님이다.
현장은 602년 하남성 언사현(偃師縣)에서 태어나 21살 때 구족계를 받고 629년 장안을 떠나 인도에 갔다가 645년 17년만에 귀국하였다.

그는 중국을 떠날 때 관(官)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돈황을 거치지 않고 천산남로를 통해 갔다가 귀국할 때는 실크로드의 남도(南道)를 따라 돈황을 거쳐 중국에 되돌아 왔다.
그는 그 해부터 역경사업에 종사하였고 다음해에는 그가 17년 동안 128개국을 지나면서 보고 들은 지리위치, 강, 산맥, 생산자원, 역사, 풍토인정 등의 상황을 구술을 하고 그의 제자가 기록을 하여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을 완성하였다.

그는 역경사업에 온 정력을 다 바치고 664년 원적(圓寂)하였는데 그는 세상을 뜨기 전에 “나는 반드시 미륵부처님 옆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실크로드 단순히 비단, 차, 옥, 보석 등의 물품만이 교류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문명이 교류한 문명 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피곤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지만 너무 정열적으로 돈황의 유물을 설명해 주는 조선족 연구원의 정성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끝날 때 까지를 기다린 뒤에 호텔로 돌아와 돈황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이하였다. <계속>

윤창열(대전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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